시애틀의 겨울은 우울하기 그지없습니다. 10월에 들어서부터는 여지없이 여름의 그 찬란한 햇빛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내내 비가 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70대 중반의 서광운 할아버지가 사무실로 찾아오셨습니다.
서 할아버지는 50여년 전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참전 용사이신데 서류미비로 참전 유공자 명단에서 누락되었다가 2004년에야 재상신이 되어 유공자 연금을 수령하게 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받게 된 연금으로 2004년부터 아프리카의 두 아이를 후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게 내 목숨값이잖아, 나야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께 갈 생명인데 내 목숨값으로 또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이야?” 그분은 후원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그 후부터 연금을 수령하는 날은 어김없이 후원금과 함께 후원하는 아이들이 보내 온 사진과 편지들을 가져오셔서 번역도 부탁하시고 염소와 함께 웃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시면서 시간을 보내시곤 합니다. 깔끔한 외모와 단정한 태도, 딱 부러지는 성품이 한국에 계시는 아버님을 연상시켜서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날은 후원금을 수령하시는 날도 아닌데 찾아오셨기에 의아해서 “웬일이세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비가 오는데 이렇게 오셨습니까?”라고 장난기 섞인 질문을 던졌는데, 할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신나는 일이 생겼어. 한달 전부터 내가 동네 한인 노인회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거든. 매일 점심 때 노인회에 나가서 치매 노인들 점심 먹여주는 일이야, 내 담당은 92세 먹은 영감이야. 처음에는 침을 질질 흘리고 얼굴에 묻히고 하는 모습이 정말 역겨워서 그만 두려고 그랬는데 며칠 지나니까 그 영감이 나를 알아보더라고. 원 참, 정이 들더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참 내 정신 좀 봐… 한달 지나니까 거기서 사례비를 주더라고. 한 달에 240달러씩 준대. 그래서 말인데 애들 8명만 더 골라 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도 노인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시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망설이다가 “그 돈은 그냥 할아버님 용돈으로 쓰시지요. 이미 애들 돕고 계시잖아요?” 했더니 막무가내로 자신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그러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분 요청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서둘러 일어나 가시면서 “빨리 가야 돼. 이거 잘못하면 늦겠는 걸? 이 영감이 내가 먹여주지 않으면 점심을 안 먹어요” 하면서 총총히 떠나셨습니다.
사무실을 떠나는 그 분의 뒷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눈을 비비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시의 몇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침 햇살이 반가운 이유는 그대가 펼쳐 놓은 조약돌 같은 희망 때문입니다. 저녁노을이 따뜻한 이유는 그대가 이루어 놓은 비단결 같은 사랑 때문입니다. 보기에 좋거나 그렇지 않거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대의 손길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대는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서광운 할아버지! 당신이 바로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아시아후원개발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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