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의 빌 켈러 편집인은 지난 일요일 세상을 떠난 어느 기자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 메시지를 사원들에게 보냈다.
“그는 정말 기자였고 영웅이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영웅이라는 단어는 형식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문기자적 자세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웅 이미지를 극대화 시킨 기자였다”
뉴욕타임스 편집인이 전 사원에게 이같은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에 속한다. 켈러 편집인이 언급한 ‘그’는 누구인가. 영화 ‘킬링 필드’(Killing Field) 스토리의 주인공인 디트 프란(65세)이다.
‘킬링 필드’의 마지막 장면은 쉔버그 기자가 태국의 난민수용소를 찾아와 자신의 통역관이던 프란과 재상봉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다음 프란은 어찌 되었는가. 그는 꿈에 그리던 미국에 왔다. 그리고 부인과 아들딸들을 만났다. 무엇보다 뉴욕타임스가 그를 사진기자로 특채하는 배려를 베풀었다. 더욱이 퓰리처상 수상자인 쉔버그 기자는 ‘프란의 삶과 죽음’이라는 스토리를 뉴욕타임스에 연재하여 영화 ‘킬링 필드’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이 영화 때문에 프란은 세계적인 영웅이 되어 백악관에도 초청되었었다.
‘킬링 필드’에서 프란 역을 맡은 캄보디아 의사 행 응고르는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았으나 LA에서 갱단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의 피살은 폴 포트 정권의 만행을 알리는 캠페인에 가담했다 하여 크메르루주의 잔당세력이 갱을 사주해 그를 죽였다는 설이 계속 나돌고 있다.
지옥문 앞에까지 갔던 프란은 수퍼스타로 변했다. 왜냐하면 폴 포트는 캄보디아 인구 800만의 4분의1에 해당하는 200만명을 죽였는데도 목격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진상조사위원회가 애를 먹었는데 프란의 경험담이 폴 포트 고발에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영화에는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진짜 스토리는 이렇다. 베트남이 크메르루주 정권을 뒤집은 후 프란은 고향에 돌아가 잠시 동장을 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굶어죽었고 어머니와 남동생 3명, 그리고 여동생 가족 등 그의 친척 50여명이 크메르루주에게 처형당한 것을 발견하고 그는 한때 삶의 의미를 잃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베트남군이 프란이 과거 미국 기자의 통역관이었다는 경력을 알아채자 태국으로 탈출한 것이다.
삶이란 참 묘한 것이다. ‘킬링 필드’에서도 비쳐져 있지만 프란이 도마뱀과 지렁이를 먹어가면서까지 역경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헤어진 가족을 만나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고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증언했지만 프란의 경우에도 가족 재상봉의 꿈이 없었더라면 그는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꿈에 그리던 미국에 와서 프란의 가정이 깨져 부인과 이혼을 하고 이어 재혼도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미국생활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백발이 성성한 그가 췌장암으로 입원했을 때는 돌볼 사람이 없어 본처 먼세르 여인이 달려와 간호하는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프란은 미국에서 자유를 찾았지만 가정을 잃은 것이다. 자유도 중요하고 물질의 넉넉함도 필요하지만 행복의 근원은 마음의 풍요로움이다. 그 마음의 풍요로움이 가정의 화목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킬링 필드의 영웅인 디트 프란은 몰랐던 것 같다. ‘킬링 필드’의 2편은 물질문명의 비극으로 끝난다.
이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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