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여인이 미술관에 그림을 감상하러 왔다. 미술관에 들어온 순간부터 여인은 꿇어앉은 자세로 시종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유심히 보고 있던 미술관 직원이 그 여인에게 물었다. “무슨 연유로 힘들게 그림을 관람하고 계신지요?” 그러자 그 여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단다. “저는 유치원 교사입니다. 내일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미술품을 감상할 것인데, 아이들의 눈높이에서는 이 미술품들이 어떻게 보일지 미리 알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은 언젠가 ‘광야’지에서 읽은 이야기다. 때로 어른들은 눈이 너무 높아 어린아이들의 세계를 알아볼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만의 눈높이가 있다. 그래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눈높이는 다르다. 있는 사람들은 눈이 너무 높아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애환을 보지 못한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들과 불구자들의 고통과 서러움을 알 수 없다. 건강한 사람의 귀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시간에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주변 병자들의 신음소리가 어떻게 들리겠는가.
일류 대학을 나온 사람들은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의 서러운 고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의 눈이 높아 무식함에 짓눌려 사는 못 배운 사람들의 절망과 답답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렇다 보니 외모는 비록 비슷한 이들끼리 모여 함께 살아가지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남남이 되어 살아가는 것 또한 인간 삶이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려면, 결국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추는 길밖에 없다. 없는 사람은 나누고 싶어도 나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돌보는 길밖에 별 도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이 세상을 내신 창조주의 뜻 아닐까. 자연계를 보면 알 수 있다. 흘러가는 ‘물’은 그래서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한다. 물은 결코 제 눈높이보다 높은 곳을 바라다보지 않는다. 낮은 곳을 찾아 흐르다 보면, 결국 넓은 대양에 이르러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오직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어린 자연법칙에 반기(?)를 들기를 주저 않는다. 있으면 기고만장하여 고개를 젖히고 독불장군처럼 목이 힘주며 높은 곳만 보고 걷는다.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낮추기 전에는 결단코 자기보다 작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비로소 걸어가는 발밑의 모든 것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돌부리가, 꿈틀거리는 미물이, 길에 파인 웅덩이가 보인다. 그래서 올바르게 인생길을 걸어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눈높이를 낮추면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고뇌가 눈에 들어온다. 이웃의 가난이 보이면, 마음에 측은지심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아픈 이의 신음소리가 들리면 달려가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고, 친구와 이웃도 생겨나 생활에 생기가 돈다. 삶의 기쁨이 별 것 있겠는가. 함께 울고 함께 울면서 동고동락하는 재미 아니겠는가. 이 모든 것이 자세와 눈높이를 낮추어야만 찾아온다니, 인생이 그래서 쉽고도 어려운 것 아닐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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