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어 상표를 재등록해 바우어 복제품 생산에 성공한 재닉 보니키. 오리지널 바우어 사는 1962년 문을 닫았다.
85종의 바우어 제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하일랜드 공장. 새로 구워진 바우어 2,000그릇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대 공황기 미국 가정들이 쓰던 바우어 그릇 인기
그릇 애호가가 창업주로 변신, 복제품 생산에 성공
60년대 문 닫은 회사 다시 살려 연매출 270만달러
백화점이나 그릇 전문점에 가보면 두툼하면서 표면에 동심원이 줄줄이 새겨진 그릇들이 있다. 얼핏 투박한 모양이지만 색깔이 노랑, 진홍색 등으로 대단히 밝다. 미국 가정들이 20세기 초중반기인 대공황에서 부터 2차 대전 당시 즐겨 사용하던 클래식 그릇들이다. 그릇을 만들었던 오리지널 바우어사는 1960년대 문을 닫았지만 그 그릇에 푹 빠졌던 한 남성이 복제판 바우어를 만들기 시작, 바우어 그릇의 인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접시 하나로 인생이 바뀐 사람이 있다. LA에 사는 재닉 보니키(53)라는 사업가이다.
거의 30년 전 그는 샌디에고의 벼룩시장에서 샛노란 접시 하나를 보았다. 런던 태생으로 당시 서핑에 푹 빠져 살던 그는 그릇을 보는 순간 “평생 이런 건 처음 보았다”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접시가 묵직하고, 단단하더군요. 그리고 색깔이 그렇게 밝고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접시 바닥을 뒤집어 보자 ‘바우어’(Bauer)라는 상표가 홈으로 파여 있었다. 대공황기와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LA의 J.A. 바우어 도기 회사에서 만들어진 그릇이었다. 그리고는 60년대부터 생산이 중단돼 수집가들의 총애를 받던 그릇이었다.
미국의 전 세대 부모들이 미트로프나 매시드 포테이토 같은 전형적인 미국 음식들을 담던 이 그릇들은 박물관에서 바우어 그릇 전시회를 하고,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치솟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비싼 돈을 주고 바우어 그릇을 산다 해도 식기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당시 유약을 바른 많은 도기들처럼 바우어 그릇도 요즘 기준으로는 납 함량이 너무 높아 음식을 담아 먹을 수가 없다. 오리지널 바우어 도기 회사는 납 기준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망해버렸기 때문이다.
보니키가 만드는 복제품 바우어 그릇들은 오리지널과 똑같이 생겼지만 납성분이 거의 없어 식기로 쓰는 데 무리가 없다.
LA에 소재한 보니키의 바우어 도기 회사는 현재 85개 종류의 바우어 그릇들을 온라인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이 270만달러에 달했고 직원은 23명이나 될 만큼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지난 10월에는 샌버나디노 근처에 있는 4만평방피트의 공장을 사들이기도 했다.
서핑에 심취했던 그는 코스코 도매상을 위한 출장 패키지를 주선하는 일을 하기도 했고, 영화제작 관련 안내서를 내기도 했으며, 부엌에서 양초제조 회사를 시작하기도 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TV 광고 제작 매니저로 돈을 잘 벌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시 40대였던 그는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뭔가를 찾고 싶었다. 그때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이 바우어 그릇이었다. 우선 그는 바우어 상표 등록을 알아보았다.
오리지널 바우어 사는 1885년 J. 앤디 바우어가 켄터키의 파두카라는 곳에서 처음 설립했다. 그리고는 1910년 당시 붐 타운이던 LA로 옮겨왔다. 처음 바우어는 링컨 하이츠의 공장에서 옥외용 화분이나 화병 같은 것들을 주로 만들었다.
접시 등 식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3년 바우어가 사망하고 난 후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릇표면에 동심원이 무늬처럼 새겨진 전형적 바우어 그릇은 1930년대 초반부터 제작되었다고 ‘바우어 : 미국 도기의 고전’이란 책에 쓰여 있다.
1948년 시어스, 로벅 사 캐털로그를 보면 동심원 무늬의 바우어 믹싱 보울 5개조 한 세트가 1달러 69센트, 지금은 클래식이 된 2쿼트짜리 도기 물주전자는 1달러25센트에 팔렸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이들 그릇은 상태가 좋을 경우 개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J. A. 바우어 사는 전후 현대적 감각의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데 실패해 지지부진 하다가 1962년 노사 분쟁을 호되게 겪은 후 그 여파로 문을 닫았다.
보니키가 상표 등록을 알아보았을 당시 바우어 상표는 버려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재등록을 하면 되었다.
보니키는 무에서부터 시작했다. 오리지널 바우어 그릇을 제작하던 주형이나 염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소장하고 있던 그릇들을 모델로 삼고 도예공들을 고용해 염료를 만들어 바우어 복사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1998년 바닥에 오리지널 상표대로 ‘바우어’ 를 새긴 완전 복제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클래식 바우어 애호가들이 이 상표가 되살아 난 것을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복제판 바우어 그릇들은 오리지널 보다 가볍고 덜 견고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복제판이 나오면서 오리지널 바우어의 값이 좀 내려간 것도 사실이다. 복제판이 있으니 굳이 비싼 돈을 주고 고풍스런 오리지널 바우어를 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복제판 바우어가 싼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2000년 바우어 디너 접시의 소매가격은 27달러 선이었다.
보니키는 그릇 제작을 위해 LA 인근의 여러 도자기 공장들을 이용하다가 하일랜드에 있는 한 공장의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는 지난해 그 주인이 은퇴를 한다고 하자 보니키가 100만달러에 매입을 했다. 아직까지는 공장 가동 수입의 30%만 바우어 계열에서 나오고 나머지는 계약 받은 일거리에서 나온다. 언젠가는 100% 바우어 그릇 만드는 일로 공장이 운영되었으면 하는 것이 보니키의 바람이다.
2004년 보니키는 한 여성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았다. 인근 글렌데일 포리스트 론 장지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후 들렀다는 그 여성은 오리지널 바우어 창업자의 증손녀였다. 그는 바우어의 2층 사무실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보니키의 2층에서 보면 포리스트 론이 한눈에 들어온다.
2층으로 올라간 후 그 여성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J. A. 바우어가 누워 있어요”
바우어 사의 창업자 묘지가 그처럼 가까운데 있었던 것이었다. 보니키는 이후 여러 번 묘지를 방문해 고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곤 한다고 했다.
<뉴욕타임스 - 본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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