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냘프나마 귀한 바람이 이제야 기별을 준다.
때 아닌 때 걸려 빛바랜 사막의 낮달이 서럽게 기우는 이즈음에서야, 황토 빛 노을 거느리고 그 모습을 드러낸 여린 바람이다.
추녀 끝에서 잔잔하게 흩어지는 풍경소리는 바로 그 실낱같은 바람의 몸짓이다. 애잔한 풍경소리는 댓돌 아래 드러누워 종일, 졸고 있는 늙은 수고양이를 더욱 청승스럽게 한다.
바람은 뜰 한 편에 청순가련하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와, 수줍게 핀 작은 들꽃들을 집적대며 연신 수작을 건넨다. 또한. 이 꽃 저 꽃으로 바지런을 떨며 긴 부리를 박고 열심히 꽃심(心)을 빠는, 앙증스런 벌새들의 날개 위에서도 파르르, 파르르 떨고는 한다.
낙조에 붉게 불던 한 무리의 구름 덩어리가 사막하늘 한 가운데에 홀로 두둥실 떠있다. 그 구름의 무더기는 마치, 바다 위 허공에다 거대한 둥근 바윗돌을 띄워 놓은 어느 천재화가의 그림처럼 신비롭다. 멀리 서녘하늘 모퉁이에는, 용암처럼 이글대는 석양을 등에 업고 황막한 모하비를 건너, 서둘러 둥지로 돌아가는 새떼들의 날개가 불타고 있다.
적막은 점점 깊어만 간다. 아는가, 풍경소리는 또 다른 적막을 불러온다. 정심(定心)한 채 염주를 굴린다.
‘빛 알들 파동으로 춤추면/ 알알에 똬리 튼 어둠(번뇌)/ 무상을 감지하고/ 속절없는 절망에/ 몸 벗을 자리’
적요의 심연에서 발효되고 정화된 나는 비로소 나를 본다. 세상을 본다. 그래, ‘보인다’고 해야겠지. 그것은 미세한 ‘떨림’이다. 굳이 법열(法悅)이라 해도 되겠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이 미워할 수 없는 세상 모든 존재들의 아름다움은 바로 경이다. 그러나 생각건대, 나는 그들의 이유 있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모른 채, 한 세월 눈멀었던 미망이 부끄럽다.
‘깎아지른 절벽에 서 있는 소나무가 설 땅이 없어 그곳에 발붙이고 있겠는가.’ 선사들의 교시이다. 그들 존재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자연과 자연 사이에는 끝없이 일어나는 사태가 있다. 그것을 ‘관계’라고 한다. ‘관계’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관계’ 속에는 무섭도록 엄격한 인과의 법칙이 작용한다. 세상은 다만, 이 인과의 지속적인 ‘흐름’일 뿐이다. ‘말미암아’ ‘비롯하여’라는 말로 표현되는 원인과 그 결과의 관계를 불교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적 본질을 설명하는 지배원리로써의 연기법은, 인간들로 하여금 공생 아니면 공멸임을 자각케 하는 위대한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라. 네 몸같이….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비워야 한다. 이기심과 오만, 편견 등과 같은 잡곡과 돌멩이로 가득 찬 쌀독에는, 잘 정제된 티 없는 쌀을 담을 수가 없다.
마음을 텅 비우고 세상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 만물의 ‘관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무치는 참회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껍질 또는 잘못, 흠)을 보고 마쓰오 바쇼(일본시인·1644-1694)는 이렇게 물었다.
‘너무 울어 텅 비었는가’
박 재 욱
(LA 관음사 상임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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