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은 양립하지 않는가.’ 권태면 총영사(사진)를 보며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어디 행사장에서 축사를 하는 그는 영 어눌한 말치였다. “외교관이 뭐 이래.” 속으로 적잖이 실망하다 되짚어보면 외교관 치고 ‘외교관처럼’ 세련된 화법을 구사하는 이도 그리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말재주가 권력과 재능이 되는 시대에 축복받지 못한 말솜씨의 이 외교관을 ‘멋대로’ 단정할 때쯤 그를 다시 보게 된 건 빼어난 문장 때문이었다.
지난해인가 그가 쓴 ‘북한에서 바라본 북한’(중명출판사 간)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2003년부터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대표로 함경도 신포에 체류하며 느낀 점을 기록한 에세이 같은 수기다.
며칠간의 탐독 끝에 책을 덮자 소름이 돋았다. 분단 현장 깊숙한 곳의 적나라한 모습을 이처럼 서정적인 문체에 담은 글은 흔치 않았다. 그가 감춰온 인문학적 지식과 사유는 어떤 당대의 논객들보다 수려하고 논리적인 문장에 담겨 있었다. 이념적으로 편협 되지 않은 시각과 객관적인 분석력도 돋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가 다시 책을 냈다. 이번에는 본업인 외교에 관한 것이다. ‘우리 역사 속의 외교관’(초록낙타 刊). 신라의 김춘추에서 구한말의 이승만까지 17명의 발군의 외교관에 대한 이야기와 현대의 외교관사(史)를 곁들였다.
당과의 협상을 능수능란하게 이끈 최고의 중국 전문가였던 김인문, 요나라의 80만 대군 앞에서 세치 혀로 국가를 구한 서희, 외교문서의 백미라 꼽히는 ‘답 설인귀 서’를 쓴 문장가 강수의 스토리는 읽기에 흥미진진하다.
여야 입장 차이로 갈린 대일 조선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사례에서는 교훈적 메시지를 던진다.
“정확히 보고 듣고, 선입관에 치우치지 않고 날카롭게 판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외교관의 자질일 것이고 정치적 상황이나 사익에 좌우되지 않고 국익을 위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외교관의 태도일 것이다.” 외교관뿐만 아니라 정치인, 고급 공직자들도 함께 경청할 대목이다.
책은 조선 중후기로 넘어간다. 조선의 무역상이자 일선 외교관이었던 역관을 다루고 떠오르는 아시아의 맹주 후금과 명 사이에서 등거리 실리외교를 구사한 강홍립, 볼모로 잡힌 주청 대사인 소현세자의 좌절대목에서는 자주와 동맹의 간극 사이에서의 해법을 제시한다.
“맹종하는 사대가 아니라 대국을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할 줄 알며, 강대국들인 상대를 생각지 않고 허풍을 가진 자주가 아니라 현실과 이상 간에 균형 잡힌 자주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무너지는 조선을 붙들기 위해 몸부림친 풍운아들의 숨 가쁜 화제도 등장한다. 최초의 주미 대사 박정양, 좌절한 중도개혁의 김홍집, 돌아오지 않는 밀사 이범진과 이위종, 일자무식 요리사에서 외교장관에 오른 이하영, 영어에 능통했던 매국노 이완용, 자주외교의 주창자 유길준, 민간 외교관 서재필, 애국과 권력의 이중주를 펼친 이승만의 외교에서 권 총영사는 오늘의 한반도 현실과 비교하며 ‘나라를 바로 세울 위인들’을 그리워한다.
그가 역사 너머 외교관들을 불러내 당대에 환기하고자 하는 것도 ‘나라를 바로 세울 외교’일 것이다.
기실 그의 30년 외교관 길의 텍스트는 일관된 것이다. 역사와 외교. 그중에서도 ‘북한’은 언제나 이 외교관의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궁극은 통일이다.
그래서 삼국통일의 주역 김춘추 편에서 그는 “우리 시대에 김춘추와 같은 끈기와 지혜로 갈라진 국가와 민족을 다시 통합하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의젓한 나라로 이끌어갈 지혜와 실천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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