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4>유학
수업료·침식 제공에다 용돈까지 받아
미국에 대한 감사의 마음 솟아 올라
클라크대학서 1년간 쉬지 않고 공부만
나는 미국은행 방문연수에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고 장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음 할 일은 연수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이라도 수료해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한 1년 후부터 유학준비를 시작했다. 한국과 기후도 비슷하고 재정적인 원조를 해주는 학교를 선택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결국 두 학교로 좁혀졌는데 하나는 매서추세츠주 Worcester 시에 있는 Clark University이고 또 하나는 University of Nebraska였다. 두 학교 다 우수한 대학이고 넉넉한 재정지원을 해주겠다고 했다. 양쪽 다 신청서를 냈고 합격을 받았다.
매서추세츠주라면 서울과 기후도 더 비슷하고 지내기가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이곳으로 결정지었다. 이렇게 학교까지 결정했는데 막상 은행을 떠나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모시고 있는 김유택 총재에게 직접 말씀드렸다. 그분은 “이제 그 나이에 학교는 무슨 학교, 내게 생각이 있으니 좀 기다려” 하고 나를 가로막는다.
며칠 후 다시 말씀 드렸더니 “자네를 홍콩 지점 차장으로 보내기로 했어” 하신다. 나는 나의 결정을 고집하고 휴직원을 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1956년 가을이다.
Worcester는 당시 인구 7만~8만 정도의 중산도시, 대도시에 익은 눈에는 시골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재학 중인 학교는 클라크 대학을 합해서 3개교. 통틀어 10명 정도의 한국 학생이 있었다.
해외 유학에서는 학비조달이 어쩌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이면에서 나는 퍽이나 무지했던 것 같다. 은행에서는 휴직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동안 보수지급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내 학비도 그렇지만 본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당시의 경제상황이랄까 왜곡된 금리 체계의 틈새를 이용하는 관행을 따르기로 했다.
은행금리는 저렴했지만 그에 비해 시중금리는 엄청 높아 그 차액이 적지 않았다. 내 돈 사정을 상의했더니 제법 큰 집을 갖고 있던 정수창군이 집을 담보로 제공해 주겠단다.
한일은행의 전무직을 맡고 있던 김상영 선배에 부탁했더니 만사 O.K. 상당한 목돈을 빌려 주었다. 이 돈을 수창군의 관계회사에 시변으로 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차액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의 유학생활 동안 살림살이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미국의 대학교는 외국 유학생에게 대단히 후했던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수업료 전액 면제에 더하여 매월 150달러의 stipend가 나왔다. stipend란 견습목사들에게 주어진 봉급을 가리켰던 것이라 한다. 나처럼 늦게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제법 적당한 낱말이다.
매월 초하루에는 어김없이 나의 메일 박스에 들어 있는 그 돈 봉투가 나를 감격시켰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학교뿐 아니라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아올랐다. 침식 외에는 돈쓸 데도 없고 주말에 여학생들과 영화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맥주를 마실 때도 선심을 쓸 여유는 충분했다.
클라크 대학에는 당시만 해도 본과 학생이 1,000명, 나머지 대학원 학생이 주야간 합해 1,000명 정도로 합계 2,000명이 좀 넘는 규모가 작은 사립대학이었다.
한국 학생은 대학원생인 나를 포함해 7명, 학년도 과목도 다르지만 시간을 내서 자주 만난 셈이다. 우리 외에 동양인으로 일본 학생이 셋인가 있었다. 일본 학생 중 한 명은 실제로는 한국인이었다. 어떤 연유로 일본에 살면서 고학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일본비자로 유학을 온 것이다.
학교 캠퍼스 내에는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가끔씩 오픈하우스 모임을 가졌다. 새로 열었을 때 또 아마도 식구가 많이 바뀌었을 때 하곤 하는 모양이었다. 한국인 여학생 중 상급학생이 하나 있었다. 나는 신참자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이점도 있어 이 여학생의 안내를 받아 제법 여러 번 참가했다. 주말이면 한인학생들과 맥주를 마시기도 했고 겨울에는 그들과 더불어 학교 앞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지칠 기회도 있었다. 동양인 학생끼리 모여서 노래마당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머리 식히기 놀기는 아주 드문 일이었고 대개는 항상 공부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 경제과 석사과정에는 13명쯤이 같이 공부했던 것 같다. 가끔 두세 명 추가로 시험을 같이 보는 경우도 있었다. 합계 7~8과목이 되는데 예습이 참으로 힘든 과정이었다. 하루에 70~80장은 읽어내야 뒤지지 않는 페이스다. 암만해도 미국 학생, 대부분이 이미 사회인이었는데 이들 미국 학생의 독서량을 따를 수 없어보였다. 이 정도의 학습량을 소화해내려니 몸에 무리가 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강제독서 덕분에 영어에 숙달되는 기회를 얻은 게 아닌가 싶다.
졸업논문은 한국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내용보다도 영어문장을 만드는 것이 힘들었다. 같은 기간에 논문 작성중인 선배가 있어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툰 타이프 솜씨로 쳐서 철본하였는데 겉보기는 고만고만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이를 읽어본 담당 Maxwell 교수는 나의 서툰 영작문에 쓴 웃음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노력상을 주는 셈으로 석사학위를 하여한 것으로 믿어진다.
당시 클라크 대학에는 사회학부 안에 경제과가 있었다. 학교가 작다보니까 사회학과 안에 유사한 몇 학과도 겸했던 것 같다. Maxwell 교수는 그 학부부장, 당시 65세 정도되신 분으로 노교수의 품격이 물씬 풍기는 온후하고 자상한 분이었다.
하루는 나를 사무실에 부르시더니 한번 훑어보라면서 한국에서 온 석사입학 신청서를 넉 장인가 건네시는 것이었다. 엇비슷해서 갑을을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미안하지만 그때만 해도 서울대의 실력이 다른 학교보다 나아보일 때였다. 암만해도 그 중 두 서울대 출신이 좀 나을 거라 했더니 그해 입학자는 그들을 택했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으면 나의 의견을 꼭 물어보았다.
한번은 본과에 있던 박원택(후에 덕성여대의 경영에 참가, 학교의 자질을 더욱 공고히 했다.)군이 경제학 시험점수가 잘 나올 것 같지 않아 걱정이란다. Maxwell 교수의 담당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걱정을 전하면서 학교의 축구부 선수로 공헌도 많이 하고 있다. 좀 잘 봐주면 좋겠다 부탁을 드렸다.
그의 답이 나를 놀라게 한다. “축구나 잘 하면 뭐하나? 학생은 공부를 잘 해야지.” 노교수가 나에게 준 귀중한 교훈이었다. 실은 박군은 너무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B학점을 받았다는 후일담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 학교에 추천한 이들 중에는 김정렴(후에 청와대 비서실장) 양준홍(후에 외환은행 지점장을 역임) 등이 있다.
나의 클라크 대학 시절은 만 1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일생 중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 정말 공부만 했다. 먼저 이야기한 대로 시간이 몹시 귀했다. 밥은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먹고 오가는 동안에도 읽을거리를 들고 쉬지 않았다.
그동안 느낀 것은 일제시대에 다닌 고등상업 3년간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대학이 과중할 정도로 학습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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