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5>뉴욕 사무소
1957년 연말 한국은행 뉴욕사무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958년 2월 초 나는 뉴욕에 단신으로 부임했다. 당시는 아직 정보산업은 꿈꾸지도 못하던 때였고 한국도 수출 제1주의를 포방하며 노력은 다했지만 아직 지평선에 여명의 빛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수출도 여의치 못하고 외환사정도 시원치 않았다. 이런 상황이어서 나는 뉴욕에 부임했지만 가족동반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대로 해외근무를 영광으로 여겼고 나를 보내는 가족들도 집안의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런 선의의 마음씨에 보답하듯이 그해 5월에는 내 가족도 뉴욕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아내와 부옥 그리고 막내 부영이다. 부옥은 11세, 부영은 9세 아내는 38세였다. 거처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114번가 서쪽 허술한 아파트 건물의 아래층, 전대 유창순 소장이 살던 것을 그냥 물려받은 것이다.
뉴욕사무소 근무는 1961년 5월까지 3년여 기간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한국은행(외국부 등을 통해)만이 각종 외국환 은행으로 외국의 은행들과 거래를 할 수 있었고 그에 따른 해외에 외환계정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지점은 아직 일본, 홍콩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장래 해외진출의 준비단계로 우선 뉴욕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무소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비영업점이다. 소장인 나의 임무는 주로 뉴욕 소재의 미국 은행들과의 관계증진, 본점에의 경제정보 제공, 현지 교포사회와의 교류 등이었다. 미국 은행들과의 관련에 있어서는 내게는 전에 가졌던 실무관계 접촉, 1953년의 연수 등으로 쌓아올렸던 지면 관계 등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꼭 이런 보고를 하라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경제 보고라기보다 정보제공 방향으로 주력했다. 당시 일본의 상사 주재원들이 하고 있는 사례를 많이 참고했다. 그들은 각종 신문·잡지 기사 중 필요한 것을 매일처럼 우편으로 본사에 송부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본사에서 전문가들이 번역하여 필요한 각 부처에 배분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수집자료 중 정부의 타 부처에서 쓰일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예를 들어 상공부, 공보부, 청와대의 경제비서실 등에 보내곤 했다. 덕분에 나는 공보부로부터 멋진 일출을 찍은 공보화보 같은 것을 가끔 받곤 했다. 뉴욕 근무 중 주미대사관과도 긴밀한 접촉을 가졌다.
◆주화 제조
뉴욕 사무소장을 지날 때 한 가지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59년으로 기억하는데 주화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 대통령의 초상을 넣은 100환짜리로 우리나라로서는 처음 갖게 되는 동전이다. 필라델피아 민트와 교섭하여 만들어 오라는 것이다. 부랴부랴 그 주화청을 찾았다.
주화청에서는 역사적으로 현직자의 초상을 주전에 넣는 예는 없다며 보통 그들이 현직을 물러나 1/4세기가 지난 후에 여론의 저항이 없을 경우 주조한다고 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10센트 동전이 단 한 번의 예외로 본인이 돌아가신 후 얼마 안 된 때였다. 이런 참고사항은 서울 본부에는 이야기 할 필요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신권자인양 굴림하고 있는 우리나라. 그의 얼굴을 돈 한 면에 나타내는데 무슨 이론이 있을 것인가. 본부의 주화 제조지시는 아무 조건도 붙지 않은 블랭킷 지령이었다. 알아서 만들어 보내란 것이다.
부사장과 상의했더니 좋은 사진을 몇장 가져오라면서 주화청의 기공사로 하여금 시작하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저기 화보 같은 데서 대통령의 사진을 수집해서 가져다 주었다. 한 열흠쯤 후 대충 됐으니 와 보라는 기별이 왔다. 얼굴은 괜찮은데 머리카락이 한 오라기도 없다. 이건 대통령에 대한 대접이 아니라 생각하고 머리카락을 좀 더 넣어달라고 했다. 가공사가 이만하면 많이 넣은 것이다 하면서 수정 견본을 설명한다. 하지만 내 눈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붓을 들고 콱콱 줄을 넣었다. 내가 제공했던 대통령 사진보다도 탄탄한 젊은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것을 선택했다. 주화에 그려진 대통령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연로하면서도 힘차고 씩씩한 영도자의 풍채가 풍겼다. 필라델피아 주화청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주화 제조에 있어서 그야말로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주었다.
◆은행가의 모임
당시 뉴욕에는 가끔 미국 주류 은행들이 외국계 은행 대표들을 초대해서 간담회 같은 것을 가졌다. 나는 그때 유일한 한국 금융계의 대표인 셈이어서 빠짐없이 참석했다. 동양에서는 일본을 비롯하여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인도 등의 은행지점장 또는 출장소들 그리고 구라파 각국의 은행 대표들이 참석했다. 그즈음 우리나라의 경제는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국제시장에서는 기껏해야 3~4등급에 속하는 수준이었다. 반면 일본은 자동차, 전자기기 등에서 선진국 대열에 앞장을 서고 있었다.
은행계에서도 일본 은행들은 매년 상위권에 드는 자가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뉴욕의 은행가 모임에서는 얼마간의 주제 발표가 있은 후 자유질의 토론에 들어간다. 이런 때 일본 대표는 당연히 자기 몫이라는 듯 남들에 앞서 한 마디 해댄다. 그들은 그들 속의 장유서열과 영어 숙달도를 감안해 한 사람의 원로가 앞장을 섰다. 그 내용은 일본의 경제력 신장을 중심으로 한 자화자찬이 되게 마련이었다. 첫 모임에서 그런 꼴을 보고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다음 모임부터는 그들의 발언이 있은 후나 아니면 그전이라고 내 의견을 전개했다. 자칫 그것은 일본인들의 의견을 견제하는 모양이 되곤 했다. 하루는 회식 끝에 일본인 원로가 내게 다가와 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나는 그의 어프로치에 Hie! 하고 대꾸도 없이 내 길을 걸어갔다. 그때 그의 제스처는 명백하다. ‘젊은이 너무 까불지마!’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합에서 화제가 될 만한 토픽에 관하여 더욱 준비를 게으르지 않으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발언을 꺼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국에 관한 좋은 정보가 들어와 그 편견을 관설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후에 들으니 일본인 은행가들은 나를 일언거사란 존칭으로 부르곤 했다고 한다. 비재에게 거룩한 칭호까지 선사해 주었다니 감루불금이다.
당시만 해도 외교관, 은행 관계자 가족들이 해외거주 허가는 대단히 선별적이었다. 뉴욕만 하더라도 체류교민이 많지 않았지만 주택을 갖고 있는 이는 더 희소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자연히 방문체류자의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줄리아드, 컬럼비아 기타 유학생들, 몇 안 되는 교민가족들이 그들이다. 대학생들로는 본국의 유수무역, 제분, 제사 양조들 사업가문의 자제들, 이름이 기억나는 이들로는 성악가 이정희 김병묵 마금희 한평숙 피아니스트 백낙호 유엔본부의 Miss 임 백낙준 총장댁 아드님 등 제씨가 있었다. 교포가족으로서는 전 대한제분 전무 김인형 선배가족, 이순영 장관댁 가족들이 우리를 찾아주곤 했다.
이런 바쁜 와중에도 우리는 매주 일요일에는 Broadway 115번가 근처의 한국교회에 빠짐없이 나갔다. 한두 번 참석하다보니 빠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총영사댁, 최 영사 내외 김구매관 내외가 결석하는 법이 없는데 우리가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매번 참석자는 50명 정도인데 우리 가족 네 명이 빠지면 큰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목사는 초로의 증후한 윤 목사, 부인 그리고 우리집 부옥이와 동연배의 따님들과 더불어 한 가족과 다름없이 지냈다. 무슨 행사가 있으면 우리가 주도하고 담당했다. 한두 번 뉴저지에 사는 우리 맏딸 내외가 오면 딸이 독창을 하는 순서가 추가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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