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공중보건국장에 지명된 흑인 여의사 레지나 벤자민
차기 공중보건국장 후보 명단엔 여러명이 올라 있었다. 2명의 TV 의학전문 기자, 시카고의 시경외과의사, 아틀랜타의 전염병 전문의, 뉴욕의 의학자 등…그러나 지난 13일 오바마 대통령이 선택한 미국 공중보건의 사령탑은 앨라배마주 걸프만 지역 가난한 어촌의 가정주치의였다.
52세의 흑인 여의사 닥터 레지나 M. 벤자민.
이날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지명식 도중 닥터 벤자민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그녀가 일하고 있는 마을의 이름 발음을 두 차례나 교정해 주어야 했다.
Bayou La Batre, 지역주민들은 세 글자를 한데 붙여 ‘Baylabatray 베이라바트레이’라고 발음한다는 것. 세 번째 시도에도 결국 대통령이 올바르게 발음하지 못하자 조용하고 겸손한 닥터 벤자민은 더 이상 교정하지 않았다.
2002년 그녀는 앨라배마주 의사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흑인여성이 미국에서 주 의사협회 회장인 된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9월엔 맥아더 재단의 ‘천재 상’ 수상자 25명 중 하나로 선정되어 50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사비에르 대학과 앨라배마 의대를 졸업한 벤자민은 센트럴 조지아 메디칼센터에서 가정의 레지던트를 수료했다.
공중보건국장(surgeon general)의 업무는 대부분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것이다. 그러나 상원에서 지명 인준을 받아야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자리이기도 하다. 누구를 선택하느냐는 대통령의 성향 내지 공중보건에 대한 방향을 말해준다. 9.11 테러 수습의 와중에서 조지 W. 부시는 경찰 스왓팀 경력이 있는 공중보건국장을 골랐고 빌 클린턴은 직설적이고 거리낌 없는 학자를 택했다가 그가 정치적 문제에 휘말리자 신중한 공중보건 관리로 바꾸기도 했다.
오바마의 최우선 국내정책 어젠다는 5천만명 무보험자에게 의사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헬스케어 개혁이다. 이런 대통령이, 때론 바닷가에서 따온 굴 한주먹을 진료비로 받으며 가난하고 보험 없는 환자들을 일생 돌보아 온 의사를 공중보건국장으로 선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의 헬스케어 개혁이 많은 의사들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닥터 벤자민의 희생정신이라 할 수 있다.
“레지나 벤자민은 미국 헬스케어의 최선을 상징합니다. 환자를 위해 아낌없이 주고 희생하며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대변합니다”라고 오바마 대통령은 말했다. “홍수와 화재, 극심한 곤궁을 겪으면서도 레지나 벤자민은 포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이 말 할 차례가 되자 닥터 벤자민은 이렇게 강조했다 : “의사들이 환자 돌보기가 이처럼 힘들어서는 안됩니다. 국민들이 이 나라에서 치료받기가 이처럼 비싸서는 안됩니다”
닥터 벤자민은 앨라배마주에서 하녀의 딸로 태어났다. 전국의료봉사단의 장학금으로 의대를 마칠 수 있었다. 3년의 무의촌 봉사를 조건으로 학비를 지원하는 연방프로그램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흰 가운의 천사’, 시골 마을의사의 길로 접어든 닥터 벤자민의 첫 걸음이었다.
레지던트를 마친 병아리 의사, 레지나 벤자민은 ‘베이라바트레이’로 보내졌다. 3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가 없었다. 환자의 80%가 빈곤선 이하의 저소득층인 이 가난한 어촌에 그녀는 유일한 의사였다.
치료비를 못내는 환자가 많았다. 닥터 벤자민은 돈이 생기면 내라고 말했다. 5달러짜리 한 장, 굴이나 새우를 담은 봉투를 진료비로 들고 오는 환자들, 다른 곳에선 진료거부 당하기 십상인 무보험 환자들, 닥터 벤자민의 환자들은 피부 빛도 다양하다. 백인, 흑인, 베트남인, 캄보디아인, 라오스인… 이들 모두에게 닥터 벤자민은 한결같이 마음 따뜻한 ‘우리 의사 선생님’이다.
이지역의 은퇴한 주상원의원인 빌 멘턴은 큰 병원에 갈 여력이 충분하지만 그에게도 ‘마이 닥터’는 닥터 벤자민이다. “그녀가 오기 전엔 우리에겐 의사가 없었지요. 우린 그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가난한 새우잡이들일 뿐이니까요”
닥터 벤자민은 이곳에 보건소를 세웠다. 곧 보건소 운영엔 의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뉴올리언스까지 주2회 왕복 250마일을 달려가 경영학을 공부하며 MBA를 취득하기도 했다.
역경은 계속되었다. 98년 허리케인 조지에 보건소가 물에 잠겼다. 새로 지을 때까지 닥터 벤자민은 포드 픽업트럭을 타고 왕진을 다니며 환자를 돌보았다. 7년 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다시 무너진 보건소를 재건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집을 저당잡혔다. 새로 지은 보건소가 문을 열기 하루 전 이번엔 화재가 보건소를 집어 삼켰다. 닥터 벤자민은 굴복하지 않았다. 전국에 도움을 호소, 보건소를 다시 세웠다.
지난 19년 그와 함께 일해 온 간호사 넬 보사지는 진료비는 말할 것도 없고 약값까지 닥터 벤자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전한다. 낮은 음성의, 웃기 잘하는, 겸손한 닥터 벤자민은 “처방해주어도 약 살 돈이 없는 환자가 많아서요”라고 말한다.
이전 공중보건국장들은 백악관의 정치 어젠다와는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닥터 벤자민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헬스케어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주어 고맙다‘고 당당하게 밝히며 개혁에 대한 일반 계몽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가난한 무보험자들의 실상을 절감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 헬스케어 개혁은 정치 이슈에 앞서 환자를 위한 인술의 연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뉴욕타임스-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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