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름 오끼나와에서 큐슈를 거쳐 대마도(쓰시마)를 들렀다. 대마도는 청정한 바다와 험한 산악이 한국의 기상을 닮은 듯 친근하게 다가와 문득 조상의 숨결이 느껴졌다. 대마도는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고토 의식을 가져온 땅이라는 사실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마도의 신사와 조선통신사 비, 최익현 비, 조선역관 비 등을 둘러봤다. 특히 시내 중앙에 있는 덕혜옹주의 추모비를 보면서 나라 잃은 비극의 잔해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숙연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대마도에 관한 역사적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약사 패트릭 황 선생의 글을 읽게 됐다.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한국 땅이라는 그 글에 뜨거운 피가 솟는 걸 느꼈다.
큰 감동을 받은 나는 본격적인 대마도 찾기 운동을 추진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한국은 물론 미국에 있는 한인들까지 참여하는 ‘세계 대마도와 일기도 반환 추진위원회’라는 모임을 발족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 과정에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확인하고 놀랐다. 왜 대마도가 우리 땅인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는 기록돼 있고 조선왕조 초기부터 대마도는 공식적으로 조선의 속령으로 편입돼 있었다. 또 대마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을 담고 있는 ‘삼국지’ 위지 왜인전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대마도가 조선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1765년 편찬된 ‘여지도서’와 182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 등에도 대마도는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 적혀 있다.
고려 때인 11세기부터 고려에 종속된 대마도는 고려사에도 고려 선종 2년(1085년)이래 ‘대마도 구당관’으로 불렀으며, 이와 비슷한 사례로 제주도의 성주를 ‘탐라구사’로, 일기도 도주를 ‘일기도 구당관’으로 명명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변방에 파견하는 관리를 보내 대마도를 통치했다.
15세기 중국에서 제작된 ‘조선팔도총회’도 대마도가 울릉도 독도와 더불어 조선 땅으로 표기되어 있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기록은 일본 역사서인 ‘대주편년략’에도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만든 지도 ‘팔도전도’에 독도와 대마도를 ‘조선의 땅’으로 표시하고 공격대상으로 표기하고 있는 점만 봐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전에는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이 조선침략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일본 영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야 했던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인 1948년 8월18일, 1949년 1월7일 두 차례에 걸쳐 이승만 대통령이 대마도가 한국령이라고 주장을 펼쳤으나,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구축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를 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제지로 중단하게 되었다.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1870년대에 대마도를 일본이 불법적으로 점령한 것을 인정하고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상의 근거만 봐도 대마도는 대한민국 땅이라는 근거는 분명하다. 이 일은 정부가 앞장서야 하지만 민간에서 먼저 문제 제기를 하고 관심을 환기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이 캠페인에 많은 한인들이 관심과 지원을 보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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