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목에 들어선 갈잎나무들은 이미 몸 비우기에 들어선 듯하다. 누렇게 말라가는 잎사귀들이 꽤나 쌀쌀맞은 초겨울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흩날리는 형편이 왠지 서럽다.
머지않아 뜨문뜨문 남겨진 잎사귀들마저 떠나보내면, 나무들은 성큼 다가선 겨울 앞에 온전히 날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허무한 감상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은 한 잎 한 잎이 언어의 비늘이 되어 바람에 휘몰리고 구르며 쌓이면서, ‘비움’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은연중 드러내는 한 자락 탈속의 시가 된다.
그렇게 정결한 시로 승화된 낙엽은 사람들로 하여금 겸허한 자기성찰을 통해 세정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보다 깊고 넓게 세상을 이해하고 조망하게 만들며, ‘지금’을 더욱 충실히 살라는 묵시의 메시지를 함께 전한다.
시(詩)라는 한자를 흩트려보면 ‘말씀’ 언(言)자와 ‘절’ 사(寺)자를 조합한 한자말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절’ 사(寺)자로 풀이하기에, 시란 ‘절집에서 선사들이 하는 말’이라 해도 되겠다. 공부가 익어 내공이 쌓인 선사들의 감칠맛 나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은 그대로가 시다. 또 선사들은 선 수행을 통해 깨친 경지를 시로 노래한다.
깨달음은 낙엽수들이 몸을 비우고 내려놓듯 숱한 망념들을 비우고 비워, 종국엔 비운 자리마저도 사라진 경지이다. 따라서 몸소 체험으로 증득한 그 경지를 말할 수밖에 없어 할 수 없이 해야 하는 말 또한 길어지면, 뜻은 오히려 멀어지는 법이기에 선사들은 풀어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어나 선시 역시 버리고 버려 군살을 발라낸 말의 뼈대, 압축되고 홑진 말의 골수로 뜻을 전하고 깨달음의 내용을 노래하는 명쾌하고 영롱한 언어의 미학이다.
노자는 학문은 쌓는 것이요, 도는 버리는 것이라 했다. 학문은 쌓으면 쌓을수록 아는 만큼 모르는 것이 더 많아져 늪에 빠진 것같이 되고, 도는 놓고 버리는 것이기에 닦으면 닦을수록 할 일이 없어져 결국에는 놀 일만 남게 된다. 할 일이 없어져 놀다보면 졸일 밖에 없게 마련이다.
사실 어찌 보면 낙엽 지는 일이나 놀며 조는 일이 딱히 기특한 일도 아니다. 그것은 마땅한 자연의 행사이며 할일 없어 졸뿐인 일은 사람의 참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행하면 될 터이지만, 공연히 일을 만들어 원숭이들 패싸움하듯 마음 바쁜 중생들에게는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어리석어 세워 놓은 차별경계가 무너지고 세상 잡스러운 것들에 꿰인 코뚜레는 물론, 아예 ‘콧구멍 없는 소’로 불리며 더는 버릴 일도 지을 일도 없어져 할일 없던 무사지인(無事之人), 그래서 대자유인이었던 경허(1849-1912) 선사는 “머리 떨구고 언제나 존다”고 했다. “조는 일 말고 다른 일이 내겐 없다”고 했다. “조는 일 말고 내겐 없기에 머리를 떨구고 언제나 존다”고 했다.
되어지는 자는 망념의 밑뿌리인 ‘나’가 있어, 마음밭 갈무리에 너무나 바빠 졸 일이 없다. 된 자만이 존다. 어쩌다 조는 자가 된 자인 것은 아니다. ‘나’를 놓아버려 졸일 뿐이라 졸다가 깨어나, 그저 무심히 쌓인 낙엽을 그저 무심히 본 자 만이 된 자이다. 선사께서 ‘할 수 없이’ 던져 놓은 절창이다. ‘빈 절에서 해 저물도록/ 한 없이 졸고 있는데/ 어디서 우수수 소리/ 깨어보니 낙엽만 쌓였네.’
박 재 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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