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쯤 시애틀 월드비전의 제 사무실로 미국인 여성 두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가주 모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프러듀서와 작가로서 지금 한 한인 여성의 지난 반세기의 삶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취재 중이라고 저를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 한국인 여성은 역시 현재 가주에서 안정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다른 단원들처럼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수원 근처 고아원에서 살다 노래를 잘 해 약 50년 전 월드비전 어린이합창단 창단 당시 원년 멤버로 발탁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합창단의 첫 미국 투어 중에 만난 미국인 후원자 가정에 입양되어 그 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그 후 좋은 직장에서 일하다 현재의 미국인 남편을 만나 자녀들을 낳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까맣게 잊고 살아왔던 자신의 어린시절의 기억이 점점 생생해지고, 그 시절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져가던 중 우연히 그 분의 스토리를 접한 방송국이 다큐멘터리 소재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결국 그분의 삶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있을까 싶어 월드비전 한국에서 오래 근무했던 저와 접촉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한국 이름과 자신이 살았던 고아원이 ‘혜광원’이라는 사실 정도의 제한적인 기억 밖에 없었습니다. 얘기를 들은 제가 보관 중이던 여러 초창기 월드비전 자료들을 꺼내어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의 역사와 당시의 한국 상황을 설명하던 중 프러듀서 되시는 분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1962년 당시 미국 투어 중에 찍은 빛바랜 공연사진에서 맨 뒷줄에 서 있는 그 분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분도 몇 장의 사진을 갖고 있는데 촬영 일시와 장소가 불분명하던 차에 드디어 알게 되었노라며 몹시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2시간여 동안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고, 저는 취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할 경우를 대비해 한국 월드비전의 담당자 연락처까지 알려 드렸습니다.
그 분들이 돌아간 후 프러듀서가 발견한 그 사진 속 어린 소녀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울컥하는 그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천애고아가 된 후 비록 합창단에 발탁돼 당시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던 미국여행을 하며 노래하고는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한 소녀의 현재가 그 사진 속에 있다는 사실, 또 50여년을 넘어 내가 그 속에서 소녀의 또 다른 현재를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소녀의 불안감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나의 감정선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 한 장의 사진 속에 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다 들어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것이 결말을 몰라 가슴 졸이는 현재진행형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이미 해피엔딩의 결말을 다 알고 넉넉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마치 재방송 드라마라는 사실입니다.
월드비전에서 20여년을 근무하며 이런 경험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뿌리를 찾기 위해 이런 저런 부탁을 해오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안심 되는 것은 그 분들이 대부분 현재 유복하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또 다른 드라마의 주연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주연이 되기에는 너무 좋은 환경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드라마에 조연으로 등장할 수는 있겠지요. 그 사진 속 소녀의 삶을 해피엔딩으로 이끌어준 그 양부모들처럼 말입니다.
50여년 후 보게 될, 또 한 편의 감동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지금 우리가 쓰기 시작하면 어떻겠습니까?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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