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국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블편한 경험을 했다. 이민국 검사대 앞에 서서 사진과 지문을 찍은 뒤, 옆에 있는 이민국 사무실로 옮겨졌다. 빈 책상 위에 한국 여권이 놓여졌다. 사무실 안을 어슬렁거리는 직원은 더러 있었지만, 여권과 그 주인은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면도를 안 해서 범죄자처럼 보였나?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 때문에 지문 인식이 안 되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한 시간이 지나 이민국 직원이 여권과 영주권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더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가도 좋다고 했다. 맥이 쑥 빠졌다.
지난 9월 추석을 전후한 때이다. 해외 금융계좌 신고로 많은 한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 주었으면 했다. 수소문 끝에 대한민국 국회 외교통상위의 H 의원이 적임자라 추천받았다. 군 출신 경력이 마음에 들었다. 목숨 바쳐 국민의 안전을 책임졌듯이, 미국 정부가 부당하게 빼앗아가는 국민의 재산을 보살펴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규정과 실태를 요약해서 H의원에게 전달했다. 외국에 사는 미국인에게는 벌금을 낮춰주는 예외규정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인들의 특수사정을 감안해서 FBAR 벌금을 면제하도록 미국 정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액 면제가 어려우면 5% 정도의 낮은 벌금이라도 힘써 달라고 부탁했다. 적게 잡아 수조원, 많으면 수십조원에 달하는 국부 유출을 막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몇 주가 지나도 답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해 H의원 사무실로 전화했다.
H의원을 대표하는 보좌관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개인 일들 아닙니까? 미국 국내법이잖아요? 내정 간섭입니다. 외교부에 연락해 봤는데 대한민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랍니다."
울화가 치밀었다. 수십만명의 국민이 같은 고충을 겪고 있는데 개인 일이라고? 외국에 나가 있는 자국민의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 내정 간섭이라고? 내정 간섭 못하겠다면 100명도 넘는 외교관은 미국에 왜 보냈는지 궁금해졌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인 H의원이 자국민의 안위보다 미국의 내치를 존중하고 있을 때, 캐나다의 재무장관은 불손하게 미국의 내정을 간섭했다. 지난 9월 워싱턴포스트, 뉴욕 타임스, 월스트릿 저널 등 유력 신문에 기고해서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난했다. 미국과 캐나다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FBAR 벌금을 물리는 것은 캐나다를 조세범 은닉처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불만을 토했다. 그리고 다각도의 외교 노력을 펼쳤다.
지난 12월2일 캐나다의 글로브 앤 메일지는 캐나다 주재 미국 대사의 발표를 특집기사로 실었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 이중국적자에게는 FBAR 벌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이며, 벌금을 낸 사람은 되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 시민권자, 영주권자 그리고 최근에 미국에 이민 온 한인들, 취업비자나 투자비자를 소지하고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한인들을 위한 특별 규정을 기대할 수는 없을까? 누가 우리를 위해서 이런 노력을 해 줄 수 있을까?
개인 일, 내정 간섭 운운하던 H의원이 미국 대사의 발표를 접하고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진다. 영주권자라는 이유로 미국 정부의 부당대우를 받을 때, 대한민국 영사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네 개인 일이니 우리는 내정 간섭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도움을 바라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국적을 바꿀 수는 없다고 15년간 영주권을 고집한 국민의 심정을 대한민국은 헤아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최재경/공인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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