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리조나-유타 접경엔 가볼만한 관광지가 많다. 특히 모양이 각각 다른 그랜드-브라이스-자이언 캐년을 돌고 라스베이거스에 들렀다 오는 2박3일 관광코스는 LA지역 한인들은 물론 한국 여행객들에게도 ‘머스트’ 로 꼽힌다. LA에 80년대 초 이민 온 뒤 그곳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실은 거기보다 더 자주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랜드 캐년에서 멀지 않은 ‘모뉴멘트 밸리’이다.
기기묘묘한 붉은색 바위산들이 남부 유타의 텅 빈 광야에 삐쭉삐쭉 솟아 있는 모뉴멘트 밸리는 고등학생 때 본 존 포드 감독의 서부영화 ‘역마차’에서 처음 구경했다. 바위 뒤에서 몰려나온 인디언들이 존 웨인 일행이 탄 역마차를 추격하는 장면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 때는 그게 미국의 어디쯤인지 감도 못 잡았지만 분명한 것은 뉴욕의 마천루보다 훨씬 인상적이었다는 점이다.
‘역마차’ 영화를 보면서 황홀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총잡이 존 웨인의 기막힌 솜씨였다. 탈옥수인 그가 권총과 장총을 신들린 듯 쏴대며 말 탄 인디언들을 꼬꾸라트릴 때마다 신바람이 났다. 국산 반공영화에서 국군용사가 괴뢰군을 섬멸하는 장면을 볼 때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나 역시 분명한 것은 지금 ‘역마차’를 다시 보면 반세기 전과 감회가 전혀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았고, 평소 이민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다가도 미국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가 종종 있다. 요즘이 그렇다. 존 웨인을 흉내 내는 총잡이들이 너무 많다. 서부개척 시대도 아닌데 지난해 시애틀 다운타운 대로상에서 경찰관이 인디언을 다짜고짜 쏴 죽였다. 레이크우드의 한 커피숍에 앉아 있던 경찰관 4명은 존 웨인 같은 범법자의 무차별총격으로 몰살당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서도 샌다. 영화 ‘역마차’에서 인디언을 들소처럼 도륙한 기병대의 후예인 한 미군병사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 16명을 사냥하듯 죽였다. 콜로라도, 콜롬바인 고교에서 13년 전 총기 난사사건으로 13명이 죽었다. 버지니아공대의 한인학생 조승희는 5년 전 캠퍼스에서 무차별총격을 벌여 32명을 살해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대량학살로 기록됐다.
고교생이나 대학생만이 아니다. 중학생, 초등학생도 총기를 학교에 가져오는 게 다반사다. 브레머튼의 한 초등학교에선 9세 소년의 백팩에서 권총이 오발돼 급우 소녀가 복부에 맞고 중태에 빠졌다. 경찰관의 어린 아들이 차 안에서 권총 오발사고로 7세 누나를 숨지게 했고, 엊그제는 타코마의 한 주유소에서 3세 아기가 의자 밑에 놔뒀던 권총을 꺼내 만지다가 발사돼 목숨을 잃었다.
미국에서는 연간 1만 1,500여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하루 32명, 시간당 1.4명꼴이다. 매년 어린이 140명이 총기오발사고로 숨지고 1,500여명이 다친다. 전체 가구의 40%가 총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에 나도는 각종 총기가 2억1,000여정에 달한다. 국민 1인당 1정 꼴이다. 총기소유 규제를 지지하는 사람이 91%, 선거에서 총기규제를 공약하는 후보를 찍겠다는 사람이 81%에 달한다.
그런데도 총기규제가 여전히 느슨한 것은 전국 총기협회(NRA)의 막강한 입김 탓이다. NRA는 총기규제가 강력한 도시일수록 총기 피살률이 높다고 주장한다. 어이없다. 그러나 더 어이없는 것은 관련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이다. 역시 미국은 알다가도 모를 나라다. 인디언을 버펄로처럼 도륙하는 장면을 그린 서부영화 ‘역마차’가 앞으로도 계속 명화로 꼽힐 것은 보나마나다.
윤여춘/ 시애틀 지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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