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를 가장 인간답게 대접하는 나라는 어디일까. 아마 그리스일 것이다. 이 나라는 온갖 화학물질을 다루며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발사를 위험 직종 종사자로 분류, 남자는 55, 여자는 50세면 풀 베네핏을 받으며 은퇴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나이에 은퇴할 수 있는 직장인은 미용사뿐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마이크를 사용해야 하는 방송인, 피리 부는 악사 모두 위험 직종 종사자다. 마이크와 피리로부터 세균에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직종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공무원은 58세면 연금을 받으며 안락한 노후를 즐길 수 있고 일반 국민도 61세가 되면 마지막 연봉의 80%를 연금으로 받는다. 지난 번 그리스 정부가 재정난을 이유로 은퇴 연령을 63세로 올리자고 했다 아테네 시내가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마비됐다.
지금 세계는 그리스 발 연쇄 부도 공포에 떨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제2당이 된 급진 좌파 연합이 ‘긴축을 강요할 경우 채무를 갚지 않겠다’며 ‘내 배를 째라’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스가 부도날 경우 그리스 국채를 잔뜩 갖고 있는 포르투갈 은행이 무너질 것이고 그리스와 포르투갈이 가면 청년 실업 50%를 자랑하는 인근 스페인이 쓰러진다. 스페인이 가면 이들과 대동소이한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채를 싸 짊어진 프랑스가 위험하다.
이런 와중에도 유럽에서 유일하게 경제가 건실한 독일은 재정 삭감 없이 추가 재정 지원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스보다 훨씬 선진국인 독일의 은퇴 연령은 67세며 연금액도 마지막 봉급의 70%에 불과하다. 왜 우리가 뼈 빠지게 일해 그리스 은퇴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지 독일 국민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는 내세울만한 제조업은 전무한 나라다. 유일한 외화 벌이 수입원은 위대한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유적을 밑천으로 한 관광 산업 하나뿐이다. 그럼에도 강한 노조와 이들의 표를 얻어야 집권을 할 수 있는 정치인들 간의 짝짜꿍 덕에 은퇴 연령은 낮아지고 혜택은 늘어나왔다. 나중에 재정 적자 폭이 유럽 연맹 허용치를 크게 넘어서자 서류 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금 채무 부담액이 유럽 최고인 GDP의 800%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그리스 혼자만이 아니라 유로 존 재정이 파탄날 것이 분명해지자 유럽연합은 과감한 재정 삭감을 요구했다.
그리스 정부는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지만 국민들은 ‘내 밥통은 내가 지킨다’며 결사항전에 들어갔고 지난 총선 결과 다수 연립 정부 구성에 실패, 또 다시 곧 선거를 치러야 할 형편이다. ‘없는 집에 제사만 자꾸 돌아온다’는 말 대신 ‘없는 나라 선거만 자꾸 한다’는 말이 나오게 생겼다.
연금 등 과다한 복지비용으로 재정 파탄 위기를 맞고 있는 곳은 그리스만이 아니다. 남부 유럽 전체가 다 그렇고 우리가 살고 있는 가주가 그렇다. 미국 자체도 지금 이를 잡지 못하면 그리스 사태가 터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들은 표와 복지와 재정 파탄과의 연결고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난 번 4.11 총선에서 안철수는 ‘투표가 밥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투표가 밥이면 투표함은 밥통이겠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인간은 염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염소는 종이가 있으면 먹고 없으며 말지만 인간은 없는 밥을 빚이라는 형태로 만들어내 먹고 난 후 배 째라고 드러눕는 재주를 가졌다.
비극(tragedy)은 원래 ‘숫염소의 노래’라는 뜻이다. 염소의 목을 따 제물로 바친 후 연극을 시작한데서 왔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비극은 고대 그리스 인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그 민주주의가 그리스를 비극의 무대로 만들고 있다. 투표가 밥이라고 믿은 유권자와 이를 선동한 정치인들이 바로 그리스 위기의 주범이며 본질이다. 참으로 염소만도 못한 존재다. 죄 없는 염소를 볼 낯이 없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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