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가 출마 선언을 하면서 한국은 본격적인 대선국면에 접어들었지만 한국인들의 관심도는 생각만큼 뜨겁지 않다. 추석을 앞두고 모인 자리에서 대선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기는 하지만 ‘누구 아니면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목소리는 별로 없다. 김대중과 이회창, 노무현과 이회창, 이명박과 정동영으로 노선 차이가 극명하게 났던 1997년, 2002년, 2007년과는 달리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는 정책이 어떻게 서로 다른가가 분명치 않다. 모두 복지 확대와 공정한 사회, 부패 일소와 한반도 평화를 말하고 있다. 박근혜는 5년 전에 비해 한껏 왼쪽으로 왔고 문재인은 민주당 내에서는 비교적 온건한 인물이며 안철수는 중도 쪽에 가깝다.
민주당 경선에서 이기면서 기세가 오르는 듯 했던 문재인은 안철수가 출마를 선언하며 약간 가라앉고 있다. 그러나 셋 중 요즘 가장 괴로운 사람은 박근혜다. 과거사에 대한 애매모호한 입장 표명으로 궁지에 몰린 판에 홍사덕과 송영선 등 측근의 금품 수수 의혹이 터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양자 대결에서 안철수에게는 확실히 밀리고 문재인에게 마저 오차 범위이기는 하지만 뒤지고 있다. 3자 대결에서는 아직 선두이기는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이마저 뒤집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나돌고 있다. 박근혜가 24일 서둘러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을 훼손한 행위며 피해자들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힌 것은 이런 위기감의 산물이다.
박근혜가 사과를 했다고 야권의 공세가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다. 이들에게는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만큼 그녀의 발목을 잡는 호재는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과거사에 매이면 매일수록 야권 지지층은 결집하며 박근혜 지지층은 동요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지지는 크게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은 딸에 대한 동정, 박정희가 이룬 고속 경제 성장에 대한 향수, 그녀의 정치력에 대한 신뢰, 범야권에 대한 불신 등의 합작품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 가운데도 다수는 5.16과 유신이 헌정 질서를 파괴했으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 지지자 중에는 이를 인정치 않는 세력이 있다. 박근혜가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이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40%대 지지율을 50%로 끌어올려야 할 박근혜로서는 골수 지지자들을 포용하면서 외연을 넓혀야 하는데 이것이 사실상 매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박근혜가 이길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박근혜 인기가 계속 추락해 이에 고무된 문재인과 안철수가 3자 대결을 벌여도 이긴다고 보고 끝까지 가는 것이다. 만약 문재인이 여론 조사에서 안철수에 져 민주당이 서울 시장에 이어 대선 후보까지 내지 못하게 되고 안철수가 끝까지 입당을 거부한다면 민주당은 사실상 당으로서 존재 이유를 잃게 된다. 두 사람 지지율 차이가 근소할 경우 단일화가 예상만큼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박근혜가 계속 뒤쳐질 경우 위기를 느낀 보수표가 대거 결집하는 것이다. 박근혜에 별로 끌리지는 않지만 한 때 ‘폐족’을 자처할 만큼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던 친노가 문재인과 함께 재등장하는 것과 정치 경험이 전혀 없고 지지 정당도 없는 안철수가 국가 최고 책임자 자리에 앉는데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많다.
정치 분석가들은 올 대선처럼 세대 차가 극명히 드러나는 선거도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30대는 압도적으로 야권 성향이고 50~60대는 대부분 친여에 가깝다. 이들이 이번 선거는 40대가 결정할 것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몇 달 전 압도적 우세였던 박근혜가 궁지에 몰려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이번 선거는 앞으로 남은 석 달 동안 판세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정치에서 석 달은 영원’이란 말도 있다. 누가 이번 대선의 승자가 될지 지금 점치는 것은 무모한 일이 될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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