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단주의 무장세력 IS 발호... 시리아 내전 틈바구니서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삶
▶ 서방세계도 적극 개입 꺼려
IS 조직원들이 시리아 점령지의 회교사원 앞에서 기독교인들을 처형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 2,000년 간 계속되는 중동지역 종파분쟁
중동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 물론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지난 2,000년간 이 지역은 전쟁과 종파분쟁으로 인한 피로 얼룩졌다. 아직도 상당수가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로 기도를 드리는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회교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세력인 이슬람국가(IS)의 발호와 시리아 내전의 틈바구니에 끼인 채‘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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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 시절, 이라크의 기독교 인구는 150만명이었지만 2003년 미군 주도의 연합군 침공을 거쳐 IS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기간 이들 중 4분의 3이 거주지에서 내쳐졌거나 종파분쟁의 올무에 걸려 숨졌다.
지난 3월 CBS 뉴스의 ‘60 미니츠’ 보도에 따르면 2014년 이라크에 남아 있던 30만명의 기독교인들 중 12만5,000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
시리아쪽의 사정도 다를 바 없다. 1920년대에만 해도 시리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이었으나 내전 발발 이후 필사적인 ‘엑소더스’가 이어지면서 지금은 전체 2,200만 인구 가운데 10%에 불과하다. 이슬람 반군의 종교적 광신주의와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의 무자비한 압제가 ‘대탈출’ 러시를 불러온 배경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지역 기독교인들에게 박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중동지역의 지배세력이었던 오토만제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아르메니아인을 대량 살육했다.
오토만제국의 몰락에 뒤이은 1930년대 중동 지역은 민족주의와 인종분규로 들끓었고 수십만명의 이라크 기독교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다른 중동국가의 기독교인구도 씨가 말랐다. 1900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거주자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나 지금은 전체 1,440만명의 인구 가운데 비이슬람이 15만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동지역의 기독교인 ‘실종’은 단순한 지역적 이슈가 아니다. 두 종교세력 간의 긴장관계를 극단으로 몰아붙여 ‘문명충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게 만든 종말론적 이슈다.
종교적 폭력은 중동지역뿐 아니라 중부 유럽과 동부 유럽에서도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1차 대전 이후 오토만,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다민족·다종교 제국들이 연이어 붕괴함에 따라 이들이 차지하고 있던 광활한 영토는 복잡 다양한 인종적·종교적 배경을 지닌 여러 그룹들에 의해 분할됐다.
독립전쟁은 늘 잔인하고, 불공정했다.
세르브인과 코소보인, 독일인과 폴란드인,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그리스인과 투르크인, 투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이 유혈충돌을 되풀이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대를 겨냥한 인종세탁을 감행했고, 여기서 상호 간의 증오와 공포가 끔찍한 유산으로 남겨졌다.
19세기와 20세기 오토만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투쟁한 발칸인들은 스웨덴, 덴마크, 프랑스 등과 같은 단일 민족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으나 이들의 독립전쟁은 민족전쟁, 종교전쟁으로 변질됐다.
투르크족은 반군에 동정적인 기독교인들을 학살했고,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변방에 있던 투르크족과 무슬림을 몰아냈다. 유대인은 이들 모두의 공적이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운동이 시작된 때부터 1923년 오토만 제국이 혼란 속에 무너져 내릴 때까지 잔인한 유혈극으로 ‘제국의 땅’은 피로 물들었다.
까마득히 오랜 시간 같은 하늘 아래 어깨를 부비며 살았던 민족들이 ‘정체성 전쟁’을 벌이며 이웃을 향해 말로 형용하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에서 발생한 내전과 소련 붕괴에 뒤이어 코카서스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전은 정체성 전쟁의 가장 최근 사례에 해당한다.
오토만제국이 무너진 후 중동 전역에서 진행된 정체성 전쟁에서 기독교도들만이 환난을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슬림이 가해자의 입장에 섰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현재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비무장세력인 기독교 집단을 신의 이름으로 ‘세탁’하는 주범은 거의 예외 없이 급진적인 무슬림 그룹이다.
혹독한 환난과 시련의 세월을 살아온 중동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생존전략을 개발했다.
첫째는 가급적 눈에 띄지 않고 살아가는 ‘은둔’ 전략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은 1차 대전 당시 오토만의 박해를 피해 험악한 산간오지로 피신했다. 또 인구 밀집지에서 생활하던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투명인간’의 삶을 살았다.
두 번째 전략은 유럽과 미국 등 중동지역의 소수 종교집단에 동정적인 ‘국외 보호자’를 찾는 것이었다.
중동의 정교회는 러시아에게 추파를 던졌고, 가톨릭교계는 프랑스에게 의지했다. 1840년대 초반부터 오토만 유대인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보였던 미국은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그러나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서방 기독교 대국, 혹은 국제사회가 ‘썩은 동아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방 기독교 국가들은 개입을 망설였고, 설사 개입을 한다 해도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경쟁관계에 있는 강대국들은 탐욕의 눈으로 득실을 저울질하며 관계의 강도와 높낮이를 결정했다.
다음으로 개발된 생존전략은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동등한 시민으로 공존하는 세속적 아랍 정체성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아랍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계 지식인들로 채워졌다. 급진 팔레스타인 진영에도 소수파인 기독교인들이 폭넓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는 실패한 독재자를 양산한 채 광채를 잃었고 중동지역의 ‘지적 시계추’는 극단적 이슬람주의로 반동했으며 기독교인들의 입지는 더욱 축소됐다.
이들의 최종 전략은 강력한 지도자와 연합하는 것이었다.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등지의 기독교인들은 하페즈 알-아사드, 사담 후세인, 호스니 무바락 등 철권 통치자들과의 밀착을 시도했다.
이같은 ‘연대’는 양측 모두에게 쓰임새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권력자들의 비호아래 어느 정도의 안정과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일부는 부를 축적하거나 정치 권력을 손에 넣기도 했다.
기독교인들은 특히 사담 후세인과 같은 소수종파 출신의 권력자를 선호했다. 이라크는 시아파 무슬림 국가지만 후세인과 그의 정권은 수니였다.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역시 소수종파의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소수파 정권과의 밀착은 이라크의 경우처럼 권력자가 축출되거나 시리아에서처럼 내전이 발생할 경우 다수파나 반대파의 보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생존전략이 모두 효력을 상실한 지금, 중동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이나 쿠르드족들을 본받아 자체적으로 중무장을 갖추거나, 우호적인 서방국으로 도피하거나 아니면 시리아의 이라크의 고대 기독교인들이 그랬듯 경건한 눈물을 쏟으며 죽음을 기다리는 세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의 환난은 계속되고 있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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