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스코리아 사회, 한국일보와 인연
▶ 연출공부 위해 이민 와 한국어 방송
김봉구씨가 자신의 작품 ‘화기만당’을 배우 김지미씨에게 선사하고 있다.
대한민국 TV방송 공채 아나운서 1호인 원로 방송인 김봉구씨가 자신이 걸어온 인생길을 들려주고 있다.
[1세대 원로 아나운서 김봉구씨]
“추울 때 따스한 바람이기를, 더울 때는 시원한 바람이기를 이렇게 다짐하며 올 곧게 살아온 삶이다”
2년 전 다큐로 만들어진 방송인 김봉구의 삶 ‘한줄기 바람처럼’은 그의 아호 ‘난여’(따스함이 한결같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공채 1호 아나운서 김봉구씨. 그에게는 개척자로 살아온 사람만이 지니는 긍지와 기쁨이 있다. 1956년 HLKZ-TV로 불린 민간방송사 ‘콜캐드(KORCAD) TV’의 역사적인 개국 방송 아나운서 멘트를 한 주역이고 1972년 해외 첫 한국어 방송인 KWHY-TV 채널 22의 개국 멘트를 한 뉴스캐스터가 바로 그이다. 1세대 원로 아나운서 김봉구(84)씨를 만나 개척자로서 방송인의 사명을 들어봤다.
■ 한국 TV방송 역사의 산증인
김봉구 아나운서는 1932년생으로 경복고(당시 6년제)와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52년 3월 한국 최초의 TV방송 KORCAD(HLKZ)-TV의 공채 1호 아나운서로 입사해 열악한 조건에도 뉴스, 인터뷰, 예능 및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 등에 열정을 쏟았다. 당시 공채로 함께 입사한 방송인은 ‘한국방송의 거목’ 최창봉(전 MBC 사장) 프로듀서가 있었다.
“당시 우리 방송은 세계 15번째, 아시아 4번째 TV방송으로 기록됐죠. 쌀 한 가마니 1만8,000환이고 17인치 TV 34만환(당시 700달러)이던 시대였어요. 1년도 못 가서 재정난 때문에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 사주에게 인계 되었습니다”
1957년 대한방송주식회사(DBC)로 개편되고 한국일보와 제휴하면서 신속 정확한 보도에 주력했다는 그는 “신문과 통신에 의존하는 보도일 수밖에 없었고 뉴스 책임은 담당 아나운서의 몫이었다. 더 빠른 뉴스를 전하기 위해 저녁 뉴스 전 을지로 입구 합동통신사로 달려가 6신을 받아 신문보다 빠른 방송을 하려고 노력했다”고 회고했다.
남다른 의욕이 TV방송을 활성화시켰음에도 1959년 2월 화재로 방송 기자재가 전소되면서 DBC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 아나운서는 “딴 방도가 없어 AFKN-TV의 지원을 받아 30분의 저녁뉴스로 방송을 이어갔고 1961년 10월 방송사가 폐쇄될 때까지 초창기의 한국 TV를 지켰다. AFKN 시절 5.16 직후 송요찬 내각 수반의 중대 방송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말했다.
1961년 12월 KBS 개국과 더불어 프리랜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TV 그랜드 쇼’ ‘가요 퍼레이드’ ‘홈런퀴즈’ 등으로 최초의 한국 TV 진행자로 명성을 떨치다가 TV 연출을 공부하기 위해 1967년 도미했다.
■ 바르고 고운 우리말 지킴이
“방송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평생 ‘바른 우리말 고운 우리말’ 쓰기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세월이 흐르며 표기법도 바뀌고 신조어도 등장하죠. ‘말’은 변하는 거니까 바로잡아 나가며 우리말을 사용해야겠죠”
한인사회 언론 방송계에서 김봉구 원로의 애정 어린 충고를 받은 기자들이 꽤 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전화다.
미국으로 건너와 그의 방송에 대한 열정은 사명감이 되었다. 1972년 구 앰배서더 호텔 코코넛 클럽에서 열렸던 ‘패티 김 쇼’의 진행을 맡았다가 방송 동료였던 고 배함덕씨를 만나 TV를 개국했고 김광수 KBS 악단장과 LA에서 제작한 쇼 프로그램은 한국 KBS에서 방영을 했다.
그는 “되새겨보면 나의 방송시절은 지금처럼 호화롭기는커녕 어렵고 힘들기만 했다. 한국에서도 전후 격변기를 견디며 방송을 했고 한국어 방송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미국에서도 개척자라는 자긍심으로 버텼다”고 밝혔다.
1978년 KBC 방송 초대 방송국장, KBLA 한인방송 뉴스 캐스터, KNIT-TV 교육방송 뉴스 캐스터 등을 지낸 김봉구 아나운서는 초창기 남가주 미스코리아 진행자로도 유명세를 누렸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일보 행사와 사업을 진행했다는 그는 “4년 넘게 한국 미스코리아 대회 사회를 맡았는데 꾸짖기만 하던 장기영 사장에게 처음 칭찬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1971년 미국에서 처음 열렸던 남가주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 심사부위원장과 사회를 맡아 산파역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 서예가로 제2의 인생 꽃피워
1977년 1월16일 회원 16명과 미주방송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아 방송인의 질적 향상을 위해 직언을 서슴지 않고 현역 방송인들을 격려해 온 그는 요즘 서예에 푹 빠져 산다.
74세에 붓을 잡고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5가지 서체 배우기로 서예에 입문한 그는 한국 민족서예대전에서 예서체와 초서체 작품으로 두 차례 특선에 뽑혔다. 무료함을 달래고 싶어 시작한 서예가 제2의 인생을 꽃피우게 한 것이다.
방송 밖에 모르는 김봉구 아나운서가 도전한 서예는 그의 올곧은 인생과 닮았다. 특히 그가 써내려간 초서는 그의 방송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 거칠고 매우 빠르게 쓰는 서체지만 예서를 기초로 하여 성숙된 흘림체, 초서. 그가 늘 지키려 노력해온 따스한 마음가짐이 합해져 보는 이들의 눈과 가슴을 울린다.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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