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鐘)에 관한 설화에 비교적 관심이 많은 셈이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 회자된 것으로 알려진 에밀레종의 전설은 성덕대왕 신종(神鐘)의 제작에 얽힌 비극이 퍽 한국적인 애환의 전형을 보여는 점에서 난 이 설화에 매혹된 적이 있다. 종의 주조에 관한 슬픈 애환 때문일까? ‘종이 운다’ 혹은 ‘종이 울린다’ 즉 울음을 연상하는 언어의 유희는 퍽 시사적이다.
에밀레 신화는 문맥 그대로의 비극적 실화에 근거했다기보다는 당대에 치열했던 권력투쟁 과정의 원형을 문학적으로 재가공한 일종의 정치고발 설화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대체적 이해인 것 같다.
친일적 한국의 파시즘은 일제 성노예를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아니 일본의 극우세력의 주장을 대변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국 정부가 일본 극우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소위 ‘위안부 한일협정’을 체결, 굴욕 외교의 본색을 드러낸 데 대한 민중들의 ‘한’을 대변했다는 점이 크게 호응을 받은 것 같다.
헤밍웨이의 명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스페인에서 파쇼 독재의 청산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무수한 인명을 자유와 민주제단에 바친 스페인 내전에 얽힌 투쟁의 일화를 소설화한 작품이고, 이 투쟁에서 산화한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조종(弔鐘)을 제목으로 내세운 것이다. 퇴행하는 역사에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때로는 완만하게, 때로는 급류를 이루며 흘러내리다. 그리고 때로는 큰 저수지에 머물다 만수가 되면 거대한 댐을 넘어 폭포수를 쏟아내면서, 새 활로를 찾아 끝없이 흐른다. 그래서 역사는 시작과 끝이 연결고리를 매고 푸는 작업을 반복되면서 끝없이 전개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지난 세기 한국의 역사는 동학혁명, 일제의 식민 강점기, 3.1독립운동, 해방, 분단, 민족상쟁, 자유당의 부정선거, 4.19혁명, 5.16국사 쿠데타, 유신, 5.18 민주항쟁, 6월 항쟁, 1979년 대선의 ‘투표소의 반란’을 통한 민주정권 수립 등 거대한 변화를 연출해 왔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이 전진의 역사가 역류하면서 우리의 역사는 훼손, 왜곡, 조작을 통한, 진실이 ‘도둑’ 맞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것이 세계사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나는 미국의 꿈나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이들 어린 생명들에게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새 역사의 장을 여는 새 기원의 새벽을 깨우는 타종을 자임한 것이다.
필자가 때로는 우중에서, 때로는 추위가 고층빌딩 사이로 폭풍처럼 세차게 몰아치는 살벌한 뉴욕의 거리에서 일제의 전범 ‘성노예’를 규탄하고 ‘세월호’의 진실을 찾자는 구호를 외치는 것도 바로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대국적으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확보하는 하나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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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뉴욕시 공립학교 과학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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