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한잔의 초대/한국 초기 디아스포라 작가 김차섭
얽매이기 싫어 소속갤러리도 없이 지유롭게 예술활동
대학2학년때 국선 입선…라커펠러 재단 장학생으로 유학
10년간 뉴욕한국일보 어린이미술대회 심사위원으로 봉사
▲장날마다 지켜본 죽음
김차섭은 아버지가 일본 나고야의비행장 건설현장감독이던 1940년, 야마구치에서 출생했다. 가족은 1944년경북 포항시 기계면에 정착했고 어린김차섭은 경주에 영향을 더 받은 고향의 산과 밭, 들에 굴러다니는 기와조각을 주워 모으며 놀았다.
해방 후 군인들의 좌익세력 총살 집행 장면을 몇 년 동안 보았고 휴전 후인 중학생때는 외부행사에 자주 뽑혀전사자 유골함을 슬피 우는 가족에게전달하였다.
대학 갈 무렵 아버지의 비누공장이망해 1959년 2월 서울미대 입학금과두달치 하숙비만 들고 상경하여 여관,사무실, 창신동 빈민촌에서 친구들과자취하며 학교를 다녔다. 맹물에 간장을 타서 먹기도 하고 버스비를 아끼려하루 몇 시간을 걸어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2학년때 국전에 입선했으나 “나눠먹기식 패거리 문화가 정착된 한국 화단의 어두운 부분에 실망했다. 미국은실력위주로 입선작이 나오는 점이 달랐다.”며 스스로 한국 주류 미술계와거리를 두었다.
1963년 서울대 미술대를 졸업하고군 제대 후 1967년 파리 비엔날레 참여작가, 1971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참여작가로 선정, 젊은 나이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으나 현실은 여전히 가난한미술선생(이화여중고)이었다.
▲한국일보 어린이미술대회 심사위원으로
10년1974년 김차섭은 라커펠러 재단 장학생으로 뉴욕 프랫대학원으로 유학왔다. 자갈밭 페인팅, 드로잉, 에칭 등테크닉의 섬세함과 정확성, 동양적 기질은 미국화단의 주목을 받아 개인전도 하고 모마와 브루클린뮤지엄 단체전에 초청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까와서 작품을 팔지 못했다’고 한다.
라커펠러 장학금도 2년후 공부가끝나면서 끝났다. 살기가 막연했다. 그래도 화상과 계약하여 평생을 얽매어살고 싶지 않았다.‘ 평생 먹고살 걱정없게 해준다“며 유명 화상이 5년간 따라다니다 포기했다.
이때 김차섭은 1976년부터 10년간뉴욕한국일보 어린이미술대회 심사위원으로 봉사하며 한인사회 어린이 수천명의 그림을 심사했고 수년간 미스코리아 뉴욕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활동하며 한인들을 만났다. 이 시절배고픈 한인화가들은 김차섭의 집을수시로 찾았고 그는 일자리를 주선하기도 했다.
김차섭의 아내 김명희는 서울미대회화과와 프랫대학원 후배다. 1976년결혼 후 아내는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졌다. 1977년 뉴욕한국일보에 입사하여 광고 디자인, 회계, 필요하면 기사도 썼다. 언젠가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1년반동안일하니 생활비는 해결되었지만 언제그림을 그릴 지 암담했다. 한국일보의성공한 한국인 기사를 읽으면서 자영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979년 10월 맨하탄에 패셥샵‘피놀라’를 열었다. 한국산 실크 수입,디자이너 브랜드를 수입하여 팔았다.
아내가 예술적 감각이 있어 장사가 잘되었다. 물건구입차 10여년 유럽을 자주 여행하면서 인류문명 발상지를 둘러보았고 이후 작품에 도움이 되었다.”김차섭의 작품은 1977년 미국청년화가전 입상, 1977년 국립판화드로잉사진전 입상, 1977년 미국신인판화전구입상, 이중섭미술상, 이인성미술상등을 수상했고 뉴욕현대미술관, 브루클린미술관 등에 소장됐다. 그는 “에칭 ‘Triangle’ (1976)이 세계최고 미술학교인 프랫이 선정한 ’세상을 바꾼125개 작품 중 하나(1887~2012)로 선정된 것이 가장 기쁘다”고 말한다.
▲갑자기 찾아온 병
뉴욕생활 15년만인 1987년 김차섭은 뇌에 종양이 생겨 상이 두 개로 맺히는 병이 걸렸다. 강원도와 기후가 비슷한 뉴햄프셔에서 2주간 요양한 후1990년 병을 고치고자 한국 춘천에서비포장도로 6시간거리인 내평리 폐교로 들어갔다.
그때 은사의 사모가 찾아와 ‘앞으로 뭐 먹고 살려느냐? ’고 걱정을 했다. 김차섭은 “화가는 그림을 팔아 먹고살아서는 안된다. 다른 것은 하기 싫어 그림만 그렸다. 예술이 사람을 살린다, 예술이 위안처가 되었다”고 한다.
미국을 떠나기 전에 소호의 로프트를 매매하려했으나 팔리지 않았고 부부는 이곳의 렌트비로 생활했다. 병이회복되자 1997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부부는 현재 집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노마드의 생활을 하고 있다. 2008년에는 위암수술을 하여 5년간의 회복기를 가졌다.
“여름 3개월을 한국에 있으면서 서울대미술관 그룹전, 북서울미술관 개인전, 환기미술관 5인전에 참여했고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 주최‘작가의 구술 채록’ (10시간짜리)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돌아왔으니 그리던것 마저 그려야지. 이 자갈밭이 완성되는데 보통 3년, 짧아야 2년이 걸린다”는 그의 작품은 섬세하고 치밀하고난해하다. 부드러운 가하면 때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자존감이 보인다.
▲스키타이인의 후예
70년대 중반 그의 초기작은 철저한기술을 지닌 장인 기질로 에칭, 기하학적 도형 작품을 보여준다. 80년대에정체성의 갈등과 고민, 방황은 작품명그대로 ‘고통의 화가’ 시절이다. 오일페인팅 회화에는 해골 자화상, 삼팔선에 해골들과 누운 자화상, 말무덤 등이 등장하는데 어린시절 경험과 유관하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 불을 가져다주어 아버지인제우스로부터 간을 독수리에게 쪼아먹히는 벌을 받는다. 이 불은 북쪽 추운지방 코카사스 스키타이 민족에게전해졌다. 중국 서안을 거쳐 한국까지온 흉노, 즉 스키타이인이다. 북방 스키타이인은 황하 문명을 일으켰고 한반도에 내려온 대표적인 스키타이인이 신라인이다.”김차섭은 ‘신라에 온 기마민족 스키타이인 후예’인 자신의 뿌리, 한민족의 대륙적 기질과 문화적 정체성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글로벌한 사고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알고 세계 역사를 알면 화합할 수있다. 역사를 개인의 문제로 끌어들여자화상을 그리는 것이다. 내가 어디서왔고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왜 하는가에 대해 항상 물어본다.”고 한다.
▲마상배와 야구공90년대이후 김차섭은 빙하기이후목축과 방랑의 시대, 남쪽 이상향에관심을 갖게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우는 것은 배가 고파서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해가뜨는 곳으로 향해갔다. 추운 북반부사람들이 따스한 지방으로 내려왔고태양을 섬겼다.”그래서 그가 그리는 지도는 서구문명의 지도와 거꾸로다. 남반부를 지도의 윗부분에 올린다. 역사의 중심이동북아시아, 기마민족인 한반도에 있다는 한국민의 정체성 확립이다. 2000년대 들어 7.2Cm 무한대의 숫자 파이가 등장한다.
“전사들이 말위에서 마상배에 왕이 주는 술을 담아 마신 후 전장으로달려갔다. 이 마상배(馬上盃)와 야구공이 7.2센티미터의 지름을 갖고 있는구형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스키타이인들이 손가락 세 개에 지름 7.2Cm크기의 공을 딱 잡고 날려높은 산의 산양을 잡아 식량으로 했다. 골리앗을 때려눕힌 크기와 부피인것이다.”그는 엄지, 검지, 셋째 손가락 세 개안에 이 공을 쥐고 던지고 치고 붙잡으러 가는 야구 경기에서 인류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느낀다고 한다.
김차섭은 40년간 부부로 해로하는아내 김명희를 만나 “행운이었다 ”고말한다. 건강도 회복되고 작품도 가끔팔리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지금이 좋다고도 한다.
화가 김차섭,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의 뿌리를, 이민자로 살고 있는오늘을 돌아보게 된다. 가늘고 마른그의 육신은 모든 물질적 장식과 허위를 걷어내고 명료한 정신만 남은 자코메티의 조각 이미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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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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