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15
▶ ■김상근의 증언: 김한조와 백설작전

1975년 1월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김한조 씨. 박정희 대통령과 근혜, 근영, 지만 3남매도 함께 했다.
-200불짜리 캐리커처
완연한 가을이었다. 워싱턴에 추색이 깊어가는 1977년 10월19일, 김상근은 착잡한 심경으로 하원 캐넌빌딩 345호실에 들어섰다. 윤리위의 소환장을 받고 의회에 출두한 것이다.
청문회장에서는 플린트 위원장의 지시로 TV와 카메라, 녹음기 등 모든 기록용 기기의 사용이 중지됐다. 노출을 꺼린 김상근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캐리커처를 그려 파는 화가들이 ‘맹활약’했다. 청문회 후에 한 화가가 자신이 그린 캐리커처를 내게 보여주었다. 내 얼굴도 보이기에 하나 살까 해서 가격을 물었다. “200달러만 내세요.” 속으로 ‘억’ 소리가 나왔다. “안 사겠습니다.”
질문은 주로 탐. F 검찰관이 담당했다. 처음에는 김상근의 신상에 관한 내용들이 오갔다.
그는 주미대사관에 1970년에 파견돼 윤승국, 김윤호, 이상호(양두원), 김영환 공사의 지휘를 받아 근무했다고 진술했다. 또 76년 11월26일 망명을 단행해 미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미국 정착을 위해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생활비로 매월 910달러를 지원받는다고 밝혔다.
-양두원 차장보의 비밀작전 지시
망명 동기에 대한 설명에 이어 청문회는 코리아게이트의 또 다른 핵심을 향해 파고들었다. 메릴랜드의 한인 사업가 김한조였다.
김상근은 72년 가을에 당시 이상호(본명 양두원) 공사 사무실에서 김한조를 처음 만났으며 74년 8월 말 그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내가 큰 사업을 하기로 했는데 당신과 같이 일해야 할 것 같다. 당신의 암호는 김 교수다.”
김한조의 전화를 받은 얼마 뒤인 9월3일 서울의 양두원 차장보는 외교파우치를 통해 서신을 보내왔다. 그 자필 서신에는 김한조가 하자는 ‘사업’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었다.
“비밀작전을 벌이는데 김한조의 신분과 비밀을 절대 준수해야 한다. 이번 작전의 명령계통은 정보부장(신직수)-나(양)-김상근-김한조다. 통상 명령 계통을 피하라. 김영환 공사(대사관 중정 책임자)에게도 이 작전을 알리지 말라. 모든 통신은 외교파우치를 통해 하고 전화 시에는 암호를 쓰겠다. 김한조는 닥터 해밀턴, 나(양두원)는 가톨릭 신부, 당신은 김 교수, 중정부장은 도지사로 하겠다.”
며칠 뒤 또 연락이 왔다. “대통령은 불국사 주지다.” 그리고 양두원은 다시 편지를 보냈다. “이번 작전명은 백설작전(White Snow Operation)이다.”
-김한조에 30만 달러 전달
그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암호명이 변경됐다. ‘불국사 주지’에서 ‘해성대(Hae Sung Dae) 교주’로 바뀐 것이다.
중정차장보로부터 비밀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김상근은 9월5, 6일경 김한조를 만났다. 그는 김상근에게 자신이 이번 작전에 뛰어든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내가 서울에 가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서거했다. 평소 육 여사가 당신 같이 훌륭한 사업가가 한국을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했었지만 나는 사업가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육 여사 서거 후에 그 분의 유지를 받들어야겠다고 생각해 한국을 위해 일하기로 했다.”
“그 일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돈이다. 얼마 뒤에 한국에서 뭔가 올 거다.”
9월11일 중정의 회계과장인 김학진이 도미했다. 양두원 차장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학진은 김상근이 살고 있던 워싱턴 근교 맥클린의 도울리 메디슨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리고 100달러짜리가 가득 담긴 누런 봉투를 건네주었다. 모두 25만6천 달러였다.
양두원은 김학진이 가져온 서신을 통해 김상근에게 지시했다. 김상근의 계좌에 있던 10만 달러를 인출해서 모두 30만 달러를 김한조에게 전달하라는 것이었다. 그 은행 돈은 양두원이 박동선에게 받아 외교파우치 편으로 보내온 수표로 김상근의 계좌에 입금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5만6천 달러는 한광년에게 주고 영수증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친정부 신문인 ‘한국신문’을 발행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김상근의 망명 선물
김상근은 양의 지시에 따라 다음 날인 9월12일 김한조의 메릴랜드 집으로 가서 30만 달러를 전달했다 한다.
김한조는 돈을 받으며 말했다. “이 돈이 어떤 돈인 줄 아느냐.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점심밥도 못 먹고 굶고 있다…나라를 위해 쓸 것이다.”
김상근은 그 증언을 하면서 감정이 격해져 말을 잇지 못했다. 김은 청문회 전에 나와 이야기하면서도 김한조의 말을 전할 때는 눈물을 보였다. 30만 달러란 거금과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이 오버랩 된 듯했다. 당시 미국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이 1천 달러였다. 연방 의원들의 연봉도 6만 달러에 불과했다.
김상근은 김한조에게서 영수증을 요구해 받았다. 양 차장보가 불국사 주지(박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영수증을 받을 것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 양의 밀명은 또 있었다. 영수증을 받은 뒤 비밀 유지를 위해 다른 서류들과 함께 소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상근은 소각 지시를 지키지 않았다.
미 의원이 물었다. “당신은 충실한 관리인데 왜 소각 않고 서류를 갖고 있었느냐?”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
김상근의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김한조는 자신이 서명한 영수증이 있음에도 끝내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금전 수령을 시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수증이 그가 김한조에게 돈을 전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됐다.
그 영수증은 김이 망명을 요청할 때도 도움이 됐다. 망명은 적성국가가 아닌 우방국 출신은 잘 받아주지 않는 게 관례였다. 김은 망명하면서 여러 ‘선물’을 미 당국에 가져왔다. 백설작전과 관련된 기밀서류들이었다. 양두원이 보낸 서신과 자신의 일기, 김한조가 30만 불을 받고 서명한 영수증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 ‘선물’은 미 당국의 수사에 큰 도움이 됐다.
-황재경 목사가 박 대통령에 소개
30만 달러가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김한조는 추가로 30만 달러를 요구하는 등 계속 돈을 요구했다. 미 의원들을 접대하고 뇌물을 주려는데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75년 6월 초, 그는 서울을 방문했고 곧이어 30만 달러가 파우치 편으로 보내져왔다. 결국 그는 KCIA로부터 모두 60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비밀리에 받은 돈을 ‘로비 자금’으로 정말 사용했는지, 그렇다면 어느 의원들에게 줬는지는 윤리위 조사의 숙제로 남았다.
김한조에 따르면 그는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주에 있는 핀들리 대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워싱턴 DC에 소재한 아메리칸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대학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중에 메릴랜드 리버델에 있는 제약회사인 미플린 맥켄브리지에 입사해 근무하다 화장품회사 ‘존 앤드 비 디(John &Bee Dee)’를 설립했다.
한 일간지의 워싱턴 특파원이 그를 한 해 2,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로 보도하면서 그는 청와대의 관심을 끌었다.
그를 한국의 최고 권부와 연결해준 인물은 그가 다니던 와싱톤한인교회의 황재경 목사였다. 김한조에 따르면 황 목사의 권유로 미국에 온 지 19년 만인 1973년에 한국을 찾았고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만났다.
-화장품회사 유일한 고용인은 처남
그가 정말로 한해 2천만 달러의 실적을 올리는 성공한 사업가인가에 대해서는 말이 많았다.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김한조란 인물은 허우대와 인물 좋은 사업가로,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해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 정도로 알려졌다.
김한조는 평소에 캐딜락을 타고 다니며 백만장자라 으스대길 좋아했다. 그러나 외부에 알려진 것과 ‘실체’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그가 와싱톤한인교회에 1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신도들은 흥분했다. 100달러짜리 구경하기도 힘들만큼 모두가 가난할 때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한 번도 그의 돈 구경을 하지 못했다. 공수표를 날린 것이었다.
윤리위의 조사에 따르면 그의 화장품 회사의 유일한 고용인인 그의 처남은 김한조의 집 주차장에서 혼자 가짜 눈썹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김한조는 자식들을 사립학교에 보냈다. 학비가 만만치 않은 학교였다. 김한조의 부인이 학비를 2개의 체크로 냈는데 그게 부도가 났다.
그의 은행계좌도 비워 있었다. 74년 9월에 그가 한국 측으로부터 30만 달러를 받기 전에 그의 은행 계좌에는 61달러 밖에 없었다. 파산상태였다.
그러다 30만 달러를 수수한 뒤부터 김한조의 씀씀이에는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돈도 갚기 시작했다. 현실과 괴리된 모순이 그 혼돈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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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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