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막식 참석한 이동우 워싱턴정신대 대책위 초대회장
“버지니아 애난데일에 소녀상이 세워지니 감회가 새롭고 말할 수 없이 너무 기쁩니다.”
이동우 워싱턴 정신대문제 대책위원회 초대회장은 27일 한국일보 앞에서 열린 ‘워싱턴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플로리다 템파 자택에서 지팡이에 의지해 노구를 이끌고 91세 남편인 함두찬 씨와 함께 참석했다. 이동우 초대회장은 1992년 12월 워싱턴 정신대 대책위를 창립해 2002년까지 활동했다.
1933년 생으로 올해 86세인 이동우 초대회장은 “위안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내 이야기나 마찬가지”라면서 “한국이 해방될 때 제 나이가 12세였는데 해방이 2-3년만 더 늦게 됐거나 아니면 제가 2-3년만 더 빨리 태어났더라면 저도 아마 일본 놈들에게 잡혀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초대회장은 “저 보다 5세 손위인 올케의 친한 친구는 위안부로 끌려갔다”면서 “그 언니가 위안부로 나중에 끌려간 것을 알고 난 후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먹었으면 나도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대위 활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이 초대회장은 “1992년에 제가 세계은행에서 근무할 때 위안부 피해자인 황금주 할머니가 워싱턴에 온 것이 계기가 돼 정신대 대책위가 창립됐다”면서 “당시 조영진 목사가 워싱턴한인교회를 이끌고 있었는데 추수 감사절 이틀 전에 저에게 연락이 와 황 할머니의 증언과 기도모임을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 증언을 듣고 정대위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창립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이 초대회장은 세계은행에서 행정직원으로 25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정대위 창립으로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면 일을 그만두는 서약을 했었다”면서 “제가 정대위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정대위 창립 다음해인 93년 5월말에 60세 나이로 은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조금만 더 일을 했으면 연금으로 훨씬 편하게 노후를 보내는 것이 보장됐는데 자신이 만든 단체 때문에 평생직장을 그만둔 것.
이 초대회장은 “오늘 이렇게 소녀상 제막식을 보게 되니 당시 조기 은퇴한 것이 전혀 안타깝지 않게 느껴진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초창기 정대위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살고 있던 맥클린 집에 김복동 할머니를 포함해 많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초청해, 그들의 이야기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 봤다. 이동우 초대 회장은 2004년 플로리다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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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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