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전쟁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서구는 그리스 문명을 서구 문명의 시발점으로 보는 입장에서 역사를 이해하였기 때문에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도 그들의 입장과 견해는 익숙한 것이다. 마라톤 평야에서 있었던 그리스의 승전을 알린 전령의 뜀박질을 기념한 마라톤 경기가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의 메인 이벤트가 되어도 우리는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 ‘300’에서 역사적 사실과 달리 페르시아인이 어리석은 야만인으로 묘사되어도 영화적 과장법이니 생각하고 넘어갈 만하다.
그렇다면 페르시아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어떠했을까? 다행히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당시 아시아를 여행하면서 듣고 기록한 아시아인의 견해가 남아 있다.
당시 그리스와 아시아에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있었고 그리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헤라 여신의 자녀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헬라스라 부르며 동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헬라스인과 비(非)헬라스인의 반목은 여인 납치라는 범죄로부터 시작됐다.
최초의 납치는 페니키아인이 저질렀다. 일단의 페니키아 상인들이 그리스의 아르고스에 가서 장사를 하던 중 물건을 사러 온 이오 공주를 납치하여 배를 타고 떠났다. 헬라스인은 그 복수로 페니키아 도시 튀로스로 가서 에우로페 공주를 납치하고, 콜키스에서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했다. 콜키스의 왕이 딸을 돌려줄 것과 배상을 요구했지만 헬라스인은 이오의 납치 때 배상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요구를 거절했다.
한 세대 후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는 헬라스로 가서 헬레네 공주를 납치해 아내로 삼았다. 트로이 전쟁의 서막이었다. 헬라스는 사절단을 보내 헬레네의 반환과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이번에는 트로이가 콜키스의 메데이아를 예로 들며 헬라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헬라스는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트로이를 멸망시켰다.
아시아인의 견해로는, 여인들의 납치는 분명 범죄행위이지만 그 때문에 야단법석을 떨며 이미 납치된 여인을 위해 복수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런데도 헬라스인은 한 여인의 납치에 대한 복수로 도시 하나를 멸망시키고, 시민을 살해하고, 약탈하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헬라스인과 아시아인 사이의 반목이 시작됐고 페르시아인은 아시아인을 형제 또는 친척으로 여기기 때문에 헬라스와 페르시아 사이의 반목도 시작됐다는 것이다.
입장이 다르면 관점이 달라지고 관점이 다르면 견해가 달라지고 견해가 다르면 역사적 사실도 달리 보이는 법이다.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중일의 고대사를 둘러싸고 이견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동연구를 통해 이견을 좁혀 가면 될 일이고, 계속하여 이견이 남는다고 하여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겨루어 보자고 할 일도 아니고, 현재의 반감이나 적대감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서로의 민족주의가 충돌하여 혐한(嫌韓)이니 혐중(嫌中)이니 혐일(嫌日)이니 하는 말이 더 나오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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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법무법인 바른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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