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지난해 각종 투자를 통해 70조원을 벌어들였다. 712조원에 달하는 기금운용자금의 연수익률이 11%로 최근 10년 만에 가장 높다고 한다. 국민의 알토란 같은 노후자금을 책임진 중추 기관이 부(富)를 늘렸다는 점에서 반길 일이다. 사실 국민연금 가입자 2,200만명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간에 금융자산 투자가나 다름없다.
우리가 자본시장의 흐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지난해 국민연금의 ‘역대급 성적표’를 들추면 한 편으로 씁쓸하다. 해외주식(24%)과 해외채권(12%)에서 높은 수익을 올렸고 국내 주식은 5% 정도에 그친 탓이다.
국내 증시가 부진하다 보니 국내 기관도 개인도 외국으로만 눈길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요즘 미국 월가를 보면 이런 현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20% 이상 급등한 뉴욕증시의 3대 지수(다우·S&P500·나스닥)는 올해도 사상 최고가를 달리는 중이다. 다우와 나스닥은 각각 3만, 1만 돌파를 눈앞에 뒀다. 코스피지수가 지난해 7%대 상승에 그치고 여전히 2,200선 안팎에서 맴도는 상황과 비교하면 부럽기만 하다.
지난 2007년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사태가 터지면서 몰아닥친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는 미국이었다. 당시 월가에서는 1920년대 대공황 우려와 함께 미국이 글로벌 패권국가로서의 지위를 잃고 중국에 많은 부분을 내줄 것이라는 우려도 잇따랐다. 하지만 당시 1만3,000 밑으로 추락했던 다우지수는 13년간 2배 넘게 뛰었다. 그동안 코스피는 1,700선에서 불과 500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미국 증시의 활황은 풍부한 유동성이 바탕이지만 ‘FANG(페이스북·아마존·넷플릭스·구글)’을 비롯해 테슬라 등 4차 산업혁명의 선발주자들이 비전은 물론 탄탄한 실적까지 내면서 월가를 또 다른 단계로 이끌고 있다.
국내 증시는 어떤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반도체가 최근 다시 힘을 쓰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로라하는 업종을 찾기 힘들다. 과거 전자업종을 비롯해 자동차와 철강, 화학 등이 코스피를 이끌었다면 이젠 삼성전자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시장이 됐다. 오죽하면 삼성전자의 비중이 너무 커져 펀드에서 한 종목을 30% 이상 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작동해야 할 지경이니 말이다.
최근 만난 한 펀드매니저는 “주식시장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잘돼야 한다”고 단순명료하게 말했다. 기업활동이 활발해져 수익을 많이 올리면 자연스레 주가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수조원 대의 펀드를 굴리는 투자 전문가가 내뱉은 평범하지만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굳이 일일이 손꼽지 않더라도 4차 산업혁명을 이끌어야 할 신산업들은 여기저기서 낡은 규제의 틀에 갇혀 힘을 쓰지 못한다.
제조업들은 중국 등과 경쟁에서 예전처럼 큰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들다. 해외 증시가 오를 때 제자리만 맴도는 ‘왕따 코스피’는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표나 다름없다.
자본시장이 이렇다 보니 3,000조원까지 급격히 몸집을 불린 시중 유동자금은 부동산으로만 몰린다. 서울의 강남을 누르면 강북으로, 강북을 누르면 수도권으로 자금이 몰려가 집값을 올리는 ‘풍선효과’만 반복한다. 그때마다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는 정부는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튀어 오르는 ‘두더지 잡기’ 게임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중의 유동성을 자본시장으로 끌어들여야 부동산도 결국 안정화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자본시장으로 유입되기 위한 각종 제도를 유연화하는 것과 함께 특히 기업이 잘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깃발’과 같은 규제를 과감히 뜯어고쳐 기업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비정상에 몰린 부동산 시장을 바로잡고 자본시장을 살리고 결국 국민의 부를 키울 수 있는 길이다. 정부는 이제 ‘진정성 있는’ 결단을 해야 한다. 두더지 잡기 게임만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새 시대의 물꼬를 활짝 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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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일 서울경제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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