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시절부터 미국이민 수속을 진행하던 아내는 나를 만나서 그 꿈을 포기하고 살다가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에 다시 이민을 진행했다. 반대하던 나는 아내와 딸보다 2년 늦게 40대 후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미국에 왔다.
특별한 기술도 없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닌 나의 미국생활은 도착즉시 아내가 주선해 놓은 지인의 도움으로 DC의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요트의 바닥 장판 교체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새벽노을이 아침을 깨우는 시간에 배 밑바닥에서 무릎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기어 다니며 일했다. 저녁 석양이 포토맥 강물위에 비쳐지면 갑판 위에서 와인을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 미국인들을 보며, 초라해진 내 현실 앞에 당당하던 자존감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리는 아픔을 맞는 그런 일상이었다.
새롭게 시작한 나의 의지는 흔들렸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갑자기 산이 보고 싶어졌다. 차를 몰고 산을 찾아 달렸다. 배가 고파왔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시골마을 맥도널드에서 서툰 영어에 주문을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미국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맛있는 빅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산 속을 헤매다 공항 근처의 어느 길에 들어섰다. 그 길은 유료 도료였고 동전만 사용 가능한 무인 요금소 였다. 수중에는 동전이 없었고 당황스러웠다. 앞쪽에는 차단기가 가로막고 있고, 뒤쪽으로는 여러 대의 차량이 줄을 대고 있어서 전진도, 후진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시간은 흘러가고 당황해 하는 내 행동을 눈치 챈 생면부지의 뒷차량 운전자의 도움을 받아 요금소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도움을 준 미국인 운전자는 내 목적지를 묻고 여유분의 동전까지 챙겨주며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다인종이 모여 사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의 원천이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곤경에 처한 처음 본 낯선 사람을 순수하게 도와줬던 그 따뜻한 마음이 지금도 종종 떠오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메릴랜드 서북쪽 웨스트민스터라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나는 이곳에서 구두수선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몇 년 전 까지 이곳에서 구두수선 일을 하시던 한국전쟁 참전용사 미국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가 그 일을 맡아 하고 있다. 구두수선 하는 일, 작게 보면 매우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도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민생활 18년차, 나도 이제는 제법 유능한 구두수선공이 되어 이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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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훈 (구두수선공, MD 독서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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