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고 거친 땅위에 세워진 전설속의 나바호 인디언 왕국을 뒤로하고, 다음의 여정지인 세도나로 떠나기 전, 톰 행크스의 ‘포레스트 검프’ 촬영지를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광대한 사막 위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듯한 모뉴먼트의 웅장한 바위기둥들을 배경으로, 이미 알고 찾아온 관광객들은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고, 그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적막함속에 압도적인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문득, 영화 속의 ‘검프’가 대륙을 가로질러 이곳에 다다르던 장면을 떠올리며, 경사진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 내려갔다 올라오는 작은 퍼포먼스를 시연해 본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날 듯한 질주? 가쁜 숨을 내쉬며 언덕길에 다다르니, 주변에서 박수가 터진다. 낯선 이들의 응원과 웃음소리는, 이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서 내가 혼자가 아님을, 함께 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환호이었던 것이다.
끝없는 사막의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나만의 질주
이제 다음 목적지인 세도나 방향의 플래그스태프를 향한 또 다른 혹성에로의 먼 항해가 시작된다. 먼 지평선 끝자락에는 하얀 뭉게구름만 걸려있을 뿐,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노랗게 말라붙은 듯한 건초만이 간간이 이는 회오리바람에 날릴 뿐, 나는 오롯이 컨트리 뮤직과 고독과 사색을 즐기며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을 가로질러 질주한다. 이곳 애리조나는 남한 3배의 면적에 인구는 고작 7백만 명 정도라니, 나머지 땅은 거의 거칠고 메마른 불모지이다.
세 시간 여를 달려 다다른 플래그스태프(Flagstaff)는 그동안 지나왔던 붉고 황량한 사막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그 끝없을 같은 사막이 끝나는 지점, 애리조나의 최고봉인 험프리 봉(Mount Humphreys)이 병풍처럼 서있는, 2천 미터가 넘는 고도의 도시는 푸르른 소나무로 채워져 있으며 그 상큼한 향을 가득 머금고 있는 작은 도시로, 세도나와 그랜드 캐니언을 가까이 하고 있어, 하룻밤 쉬어가기에 좋은 곳이기도 하다.
영험한 기가 솟는다는 신비의 땅 세도나를 향하여
플래그 스태프의 푸른 산맥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남쪽으로 차를 달린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의 거리이지만,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가는 이 길은, 마치 하나의 다른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통로처럼 여겨진다.
상쾌한 푸른 소나무 숲으로 가득했던 작은 도시를 출발해 좁고 구불구불한 코코니노(Coconino) 국유림을 벗어나니, 풍경은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 푸른빛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땅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와 장구한 세월 동안 강렬한 태양과 바람에 연마된 붉은 산들이 각양의 모습으로 차창 앞으로 다가선다.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듯한 거대한 붉은 산들(Red Rocks)이, 마치 혹성의 어느 골짜기의 모습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하나하나의 바위기둥들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며, 그것은 태초에 신이 설계하고 자연이 빚어낸 살아있는 조각된 군상들이며, 오랜 세월 태양이 구워낸 영혼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된 거대한 공간이자 자연의 성소이다.
태양이 붉은 바위를 스칠 때마다 주홍빛과 진홍빛을 내뿜으며 눈부시게 타오르는 땅 세도나(Sedona), 황토빛의 강력하며 영험한 기를 뿜어낸다는 이곳은 야트막한 산자락 곳곳에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공기 속에는 흙과 소나무향과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배어 있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부터, 세도나의 가장 상징적인 케더더랄 락(Cathedral Rock)으로의 하이킹을 위한 채비를 서두른다. 마치 신이 조각한 대성당처럼 보이는 이 바위산을 오르는 길은 험난하고 위험도 하지만, 그 고난 끝에 마주한 풍경은 경외심 그 자체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보인톤 트레일(Boynton Trail)에서 양편에 늘어선 수많은 군상들의 사이를 흙먼지를 일으키며 걷는 동안, 나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젖어 몽환적인 상태에 빠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도중에 서브웨이(Subway)라는 숨겨진 동굴에 들어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침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하게 내뿜는다는 에너지 볼텍스(Vortex)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고요히 깊은 숨을 들이쉬며 명상에 빠져본다.
작고 고즈넉한 예술의 향이 흐르는 세도나의 거리
하이킹에서 돌아온 후, 세도나의 작은 시내를 거닐며 느낀 소감은, 마치 붉은 바위 아래 숨겨진 보석 상자인 것만 같다. 아담하고 소박한 카페에서 커다란 벨락(Bell Rock) 너머로 솟아오르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먹는 저녁은, 지친 몸과 마음에 평온을 가져다주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세도나는 나에게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 것을 넘어, 내면의 깊은 울림으로 치유와 영감을 주었고 또한 고독과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긍정적이며 건강한 에너지를 가득 선물로 주는 그런 곳이다.
거친 서부여행의 피날레, 그랜드 캐니언으로
지구의 중심부 깊은 곳으로 부터 나오는 강력한 세도나의 정기를 온몸에 가득 충전한 나는, 대 서부 탐험의 정점 그랜드 캐니언으로 향한다.
트래킹의 시작점인 사우스 림(South Rim)의 마더 포인트(Mather Point)에 서서 관망하는 그랜드 캐니언은 마치 iMax 영화관에서 본 듯한 수억 광년 밖의 어느 혹성의 광경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하늘에는 여전히 작렬하는 태양이 이글거리고 수천 길 깊은 저 아래에는 콜로라도의 초록빛 강물이 유구한 자연의 역사와 함께 구비구비 계곡의 그늘 뒤로 사라져 간다. 바람에 날릴 듯 아슬아슬한 절벽 길을 따라 수백만 년의 시간을 거슬러, 절벽을 깎아 만든 듯한 좁은 자갈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간다.
10일간의 여정, 무한할 것 같은 사막을 관통하는 질주, 붉은 바위 동굴에서의 명상의 시간, 그리고 마침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백만 년의 암석층을 지나치는 행군을 통해, 새삼 자연의 위대함에 경외심과 겸허함을 갖게 하는 이번 대 서부의 트레킹은, 나에게 대서부의 위대한 여정을 완성하는,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장일 것이다.
내년이면 나도 메디케어 대상자가 되는 나이이다. 그럼에도 혼자서 다니는 이런 여행이 나는 너무 좋다. 불평할 대상이 없고 간섭할 이가 없는 이런 자유로움 속에서 나만의 고독을 마음껏 즐기며, 세상의 놀라운 풍경을 찾아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튼튼한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듀크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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