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의정 관장의 민경호 UC버클리 명예교수의 삶*태권도의 세계화
▶ 태권도와 무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 후대가 이어가야

민경호 교수 은퇴시 UC 버클리가 전달한 감사장.
민경호의 유산
민경호를 아직 까지도 불편하게 만드는 많은 태권도인들의 인식은 그의 무도 수련의 출발이 태권도가 아닌 유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그가 태권도를 미국 아마추어 선수 연맹(AAU)에 독립 단체로서 만들려고 상정한 안건을 당시 대학을 중심으로 유도와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던 유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통과시킬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정황을 돌이켜보면서 태권도 사학자들이나 태권도인들이 ‘민경호는 유도인이다’고 설정하고 ‘태권도의 세계화는 유도인들이 일구어 낸 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두 명제는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두 명제는 몇 가지 합리적인 질문을 유도한다. 첫째는, 민경호와 유도인들의 단결력과 끈질긴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태권도의 세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태권도보다 일찍 세계의 문호를 튼 가라테나 쿵후는 왜 아직도 올림픽에 들어가지 못하였는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의 우슈도 왜 아직 올림픽에 들어가지 못하였는가? 이 질문을 해보면서 개발도상국의 위치에 있었던 한국의 태권도가 1974년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공인 스포츠 단체의 정식 종목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그리 쉽게 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그 당시에 민교수를 대신하여 과연 이 일을 만들어 낼 열정과 능력을 갖춘 태권도인이 있었던가? 둘째는, 민교수는 고등학교부터 태권도를 해왔지만 그 당시에는 태권도 경기가 체계화되지 않은 시기여서 유도에 주력하였었다. 그는 또한 체육학을 전공하여 유도와 태권도 이외에 축구도 지도를 하였다. 그를 단순한 유도인으로 굴레를 씌우는 것은 불합리한 접근이 아니지 않은가? 셋째는 60여년이상을 태권도를 수련하고 태권도를 위해서 노력한 분을 유도인이라고 좌시한다는 것은 너무 편협된 시각이 아닐까?
미국에서의 태권도는 초창기인 1960년대에 ‘가라테’에서 ‘코리안 가라테’로 그리고는 ‘태권도’로 스스로 명명하게 되었다. ‘태권도’라는 이름도 1955년 이전에는 이 세상에 없던 말이었다. 1945-1965년까지는 당수도, 공수도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 민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러한 명칭의 변천이 1969년 버클리 대학의 정규 체육 프로그램의 명칭이었던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순수 태권도인들도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태권도’의 올림픽을 통한 세계화를 민경호가 주력하게 된 이유를 인터뷰를 통해서 전체적인 정황을 돌이켜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눈에 보인다.
첫째는 민경호의 개인적 깨달음이다. 내가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그를 만나면서 들어왔던 이야기가 바로 유도와 태권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도는 한국 사람들이 아무리 메달을 많이 따고, 미국에서 아니 세계 무대에서 주도권을 잡아도 일본이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유도의 ‘업어치기’가 세계무대에서는 종주국 언어인 올림픽 공용어로 ‘세오이 나게(Seoi Nage)’가 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것이 태권도였다. 태권도는 한국 것이었기 때문이다. 태권도의 세계화, 태권도의 올림픽화라는 과제는 그의 애국심을 불타게 만든 요소가 되었다. 태권도를 올림픽에 가입시켜 한국이 종주국이 되고 한국어가 올림픽의 공용어가 되도록 하려는 것은 오래 전부터 그가 꿈꿔 왔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심의 일환으로 태권도라는 명칭이 버클리 대학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69년 가을학기에는 ‘가라테-태권도’로 강좌가 개설된다. 1970년 봄학기에는 ‘태권도-가라테’로 강좌가 개설된다. 그리고 1970년 가을학기부터는 가라테라는 이름을 떼고 그냥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강좌가 개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두번째는 유도 선수생활을 통해서 배운 충격적인 교훈과 그를 도와 큰 일을 일구어 낸 동료 유도인들의 활동이다.
그는 1964년 뉴욕에서 있었던 월드 페어의 하나로 전 미국 AAU 유도 대회에 참석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몇 가지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다섯 번의 시합을 모두 이겼는데도 시합 규정이 바뀐 것을 몰라 일등자리로 갔더니 이등을 한 선수가 자꾸 그와 자리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five bad point system’이라는 것으로 한판승은 감점이 없고, 절반승은 1점 감점이 되고 한판패는 2점 감점이 되고, 5점 감점이 되면 탈락하는 시스템이었다. 그 선수는 한 판으로 올라와서 절반으로 올라온 그보다 점수가 높았다는 것이다. 민교수는 이날의 패배를 통해서 규칙을 몰라서 패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규칙을 만드는 협회를 만들기도 하고 그런 협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세번째는 UC 버클리가 교수들에게 요구하는 진급구조이다. 그가 수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인 UC 버클리의 교수였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UC 버클리의 교직원 매뉴얼을 보면 진급을 위해서는 아래의 4가지 사항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1) 강의, 2) 연구 및 창작활동 3) 전문분야에서의 우월성 및 활동, 4) 대학이나 사회를 위한 봉사이다. 버클리에서 교수가 되면 위의 항목들을 준수하여야 한다. 조교수에서 부교수가 되는 과정을 테뉴어 트랙(tenure track) 이라고 하는데, 테뉴어를 받은 교수를 대학은 쫓아낼 수 없다. 하지만 업적에 따라서 월급이 올라가지 않도록 할 수는 있다. 대부분 테뉴어를 못 받으면 다른 학교로 이직하게 된다. 하지만 민교수는 위의 모든 사항을 초과 달성하여 은퇴할 때에는 최대 호봉(레벨 7)보다 단계가 높은 대우(레벨 7.5)를 받았다고 한다. 2006년 6월 30일에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버클리를 떠나는 그에게 생명과학 학과장은 그의 “37년간 UC 버클리와 생명과학 분과에서 헌신적인 봉사와 미국에서 일류 대학 무도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끈 민경호(켄 민)박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나는 오늘 그와 그의 부인 민 여사, 그리고 나의 아내와 넷이서 점심 식사를 했다. 그가 월, 수, 금 규칙적으로 다니는 수영장에서 그동안 자기가 누군지 모르던 수영 동료들이 드디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수영을 하고 있던 옛날의 제자 두 명이 그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와서 90도로 인사를 하드라는 것이다. 미국인 두 명이 수영복 차림으로 와서 그에게 예절을 갖춘다는 것, 그가 우리에게 남긴 중요한 유산이 아닐까?
사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한국전쟁을 겪어 이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으로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가진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돈만 벌려고 했던 다른 젊은 이들과 다른 그와 결혼을 하게 되었단다. 태권도와 무도를 통해 이루려고 했던 그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은 이제 우리가 이어 나가야 할 귀중한 유산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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