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쯤 일이다. 다운타운에 있는 한인은행에서 크래딧카드로 현금 서비스(cash in advance)를 받으려 했더니 안된다고 했다. 창구직원의 설명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늘 돈에 쫓기며 살다 보니 돈에 관한 한 어디 가서든 큰소리 한번 못 치고 주눅이 들어 지내던 터라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자신 있게 대꾸하지 못하고 은행 문을 나왔다. 개인구좌가 있는 미국계 은행엘 갔다. 같은 서비스를 요구했는데 두말도 않고 원하는 금액을 현금으로 내주었다. 지난해에는 올림픽가에서, 최근에는 웨스턴가에 있는 또다른 한인은행에서 세번째 같은 경험을 했다. 크레딧카드로 현금 서비스 해주는 일이 그렇게 난해한 일인가? 이 곳의 한국계 은행들 가운데 대표적인 세 곳 은행에서 모두 한 차례씩 그런 일이 있었고, 한인은행에서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뿐 아니다. 언젠가 한번은 버몬트에 있는 어느 한인은행에서 잔돈을 바꿔간 일이 있었다. 가게에 가서 보니 일부 다임롤에 페니가 절반 정도 섞여 있었다. 액수로 치면 얼마 안되는 것이었으나 미국에 살다보니 습관적으로 다음날 은행에 가면 바꿔 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아갔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절을 당했다. 은행은 아무 잘못이 없다니 고객이 의도적으로 다임롤에 페니를 섞어 은행을 찾아온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때의 기분이란 참으로 황당했다. 왜 귀중한 지면에 사소한 실수(?) 정도를 가지고 장황한 설명을 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 한국계 은행들이 너무 장사가 잘 되어 분에 넘치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자랑기사가 불황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는 많은 그들의 고객들과 크게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호황도 좋고, 흑자 경영도 좋다. 한국계 은행들이 순익을 많이 냈다고 해서 그것을 탓할 한국인이 있겠는가? 어느 날 신문을 보니 앞면에는 어떤 한인은행의 상반기 수익이 전년 한해수익을 훨씬 상회했다는 기사가 실리고 각 은행들은 앞다투어 여름 보너스를 지급한다고 발표하고 있는데, 뒷면에는 의류업계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린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한인타운의 젖줄이라고 하는 다운타운의 한인 의류업계, 불황의 늪에 빠진지 벌써 3년째라고 한다. 중남미 시장이 붕괴되고, 아시아권 상품의 수입비중이 늘고, 미국 내의 로컬 시장도 월마트와 코스코(Costco)등 초대형 소매점의 살인적 공격경영으로 한인 소매시장이 타격을 받아 영업여건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로 인한 매출부진과 자금압박은 도미노 현상으로 전체한인 의류업계에 영향을 주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자바에서 돈을 버는 것은 옛날 얘기고 지난 여름장사를 제대로 못한 상당수의 업소가 크리스마스 대목이 지나고 나면, 내년 1월에는 어느 해보다 많이 조용히 자바를 떠날 것이란 소식도 들리고 있다.
불황이 반드시 다운타운 의류업계 얘기 뿐만은 아니다. 미국 경제 호황이 서로 자기네 덕이라고 민주, 공화 양당이 싸운다지만, 그것은 주류사회 얘기일 뿐, 한인 스몰비즈니스도 호황은 아니다.
어찌되었거나 한인은행 고객의 90% 이상이 한인임은 분명하고 그들 대부분이 타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류사회에서 벌어다 한인사회에 쓰는 셈이다. 그 자영업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의류업이고, 한인사회의 자금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한인타운의 젖줄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다운타운 의류업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은행들이 흑자를 많이 냈다고 보너스 잔치를 한다는 것은, 한국의 IMF시절 온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일부 부유층에서 더욱 돈을 벌고 호화스런 생활을 했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시간이 돈인 미국에서, 한인은행들 일선 창구에서는 아직도 은행업무의 기본인 현금 서비스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못해 고객이 미국은행을 뛰어다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속담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작은 일 같지만 작은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길 수 없듯이, 한인은행들은 은행업이 금융업이기 이전에 서비스업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얼마전 대학에 다니는 조카에게 은행구좌를 하나 갖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한인은행과 미국은행을 꼼꼼히 비교한 다음 미국은행에다 구좌를 열었다. 냉정하게 한번 모든 한인은행들의 고객을 정밀 분석해 보자. 상당수가 영어가 불편해 싫든 좋든 하는 수 없이 한인은행을 쓰고 있다. 영어가 불편한 1세대들의 시대는 가고 숫자도 줄고 있다. 과연 영어가 불편하지 않은 우리의 2세들도 같은 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소가 없고 불편한 한인은행을 이용해 줄 것인가. 한인사회의 바른 성장을 위해선 이제라도 한인은행들은 한번쯤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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