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일상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일주일에 하루는 아예 비디오 보는 날로 정해 놓고, 날이 섰던 정신을 무장해제한 채 몰두한다. 따지고 들면서 보자면 때로 어처구니없거나 실소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더라도 그 시간만큼은 부담 없이 사고하고 느낄 수 있어 나름대로 생산적인 휴식인 셈이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영혼의 앙금들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은 좋은 경험으로 내 안에 고이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경우 불신이 불신을 낳고 거짓이 거짓을 낳아 어떻게 더 수습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을 겪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면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환멸과 상처로 부대끼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우리네 삶의 솔직한 내면 풍경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하면서, 화면 속의 숱한 인간 드라마를 통해 자기를 반추해 가노라면 번뜩 어떤 해결점이 마음에 스치기도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기묘하게도, 타인의 일은 명경처럼 잘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자기 일에는 객관적인 눈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드라마 속에서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대리체험을 하는 일은 이런 인간적 약점들을 극복하는데 의외로 처방력 있는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드라마들의 경우, 인생사의 깊은 면모를 성찰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좀 빈곤하다는 인상을 준다. 주제의식도 문제이고, 별 것도 아닌 일들을 가지고 꼬이고 꼬이는 일의 연속으로 엿가락처럼 늘여 극적 긴장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일에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니다.
얼마 전 친구 소개로 일본의 미니시리즈 한편을 보았다. 자폐증 처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은 현실적인 다른 능력은 좀 떨어지지만 ‘하늘을 읽을 줄 아는’ 아가씨였다. 구름의 모양과 양, 바람의 속도와 강도를 측정하면서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원시적인 도구만을 쓰는 그녀의 ‘일기예보’는 첨단의 장비를 갖춘 기상대의 것보다 훨씬 정확했다. 그녀는 이 능력을 통해서 사회적 편견과 어린 시절의 여러 가지 어두운 기억, 그리고 상처를 극복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 하늘 읽기는 사실 인간의 마음 읽기와 통해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가 - 그 또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인간이었다 - 그녀의 그 맑은, 하늘 같은 마음에 녹아들면서 서로를 아름답게 치유해나가는 과정은 인간의 실존, 그 심연에 있는 갈망과 꿈을 차분하게 펼쳐 보였다.
이 작품의 여운이 아직도 진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하늘을 보면서 진액처럼 내어놓는 주인공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인생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일기예보가 아니라 삶의 일기예보였던 것이다.
나는 기껏 일본 비디오 한 편을 보고서 사뭇 진지한 어조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특별하게 느낀 것은 분명히 있었다. 드라마 한편에도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문화적 노력, 그것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깊고 풍요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한편 부럽고도 한편 뼈아픈 깨달음이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