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20년 동안 대학 동문회 파티에 가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기와 달리 숫기가 없는 나는 그런 자리에서 남들처럼 신나게 어울릴 만한 주변머리가 되지 않는다는 자기 주제를 엄격하게 파악하고 있으므로, 아예 그런 자리엔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참가해보니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30여년 전 대학 친구들의 얼굴에는 이젠 가릴 수 없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우리들의 자리가 원로 선배석에 끼어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어느 모임에 가나 막내여서 귀여움도 독차지하고 무슨 실수가 있어도 그냥 넘어갔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덜컥 어느새 가장 ‘상석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나의 인생도 시간의 물살 속에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만감이 마음을 저민다.
며칠 전 읽었던 신동아 12월호에 실린 ‘한국의 기인, 괴짜 10인 열전’이란 기사가 머리속에 떠올랐다. ‘뇌호흡 개발한 국제적 명상지도자’‘행복한 강사로 뜬 사람 사귀기 귀재’‘70대에 히말라야 무산소 등정한 금속공학자’‘주역 성경 넘나드는 도인 목사’‘상식 파괴하는 말총머리 한의사’‘국악에서 재즈까지 음악의 연금술사’ 등등, 제목만 읽어도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40대 중반에서 80대에 이르는 그들의 남다른 생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깊이 생각하기, 사물을 자세히 보기 등등 자신들에게 주어진 육감을 모두 치열하게 갈고 닦은 열매였다.
‘북’의 달인은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 눈으로 들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귀로 보이는 경지가 되었단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가 관객의 가슴에 비가 쏟아지게 하고, 천둥과 번개를 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한 강사로 인기를 모으는 ‘마음 사냥꾼’인 아줌마의 취미는 ‘멍하니 하늘 쳐다보기, 바람 맞으며 무작정 걷기’란다. 자신을 우주의 품에 그대로 맡기는 넉넉함이 그녀에게 있다. 주역에 능통한 도인 목사의 인간사 해법은 하나의 잠언이었다. “인생의 문제는 해답이 있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성숙해져서 문제 자체가 문제되지 않을 때 비로소 풀린다”는 것이다. 실로 ‘초월이 주는 자유’이다. 말총머리를 한 50대 초반의 한의사가 펼치는 화두는 고정관념에 대한 일격이었다. “매사를 뒤집어 사고하라. 상식에 매이지 말고 원리에 눈 떠라” 삶의 모양새는 각기 달랐지만 그들의 사고는 누구보다 자유로우며 맹렬하게 자기 자신과 맞서서 전진 또 전진한다는 점이다.
반생의 삶을 훌쩍 뛰어넘어 만난 동창들의 모습에서 사실 나는 나를 만나고 있었다. 문득 파티에 오기 전 전화했던 후배의 말이 떠올랐다. 이번주 성당 기도회의 주제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주제는 ‘세우는 사람, 부수는 사람’. 그는 겸손하고 따뜻한 품성을 갖춘 이를 ‘세우는 사람’, 이기적이고 정의롭지 못해 남에게 폐가 되는 이를 ‘부수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성품의 존재로 사는가가 보다 중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허구를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운 나를 세우며 세상에 덕이 되는 그런 삶. 제야의 거리에서도 외롭지 않고 허무하지 않으며, 내일의 희망을 활기있게 다지는 그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2000년이 끝나가면서 우연찮게 참석한 자리에서 나는 또 새롭게 철들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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