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개화기 때 미국 선교사들이 펴 낸 「코리아 리뷰」에 종로 길바닥에서 파는 ‘이상한 대나무 컵’ 얘기가 나온다.
「컵에 물이 7푼(10분의 7)을 넘으면 그 컵의 밑바탕이 저절로 빠져 쏟아지는데 무슨 쓸모가 있다고 사고 파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시지도 못할 물을 부어 놓고 버리게되니 물 한 방울일지라도 아끼자는 우리 선인들의 지혜의 컵이요, 인생만사 돈이건, 명예건, 권력이건 분에 넘치면 이 ‘이상한 대나무 물컵’ 처럼 아래로 쏟아져 망신을 당한다는 세의 컵인 것이다.
옛 선인들의 소유철학(所有哲學)에서 칠흡(七洽)이란 말이 있었다. ‘10 중 9는 넘치기 직전으로 불안하고, 차라리 10 중 7이면 흡족하다’ 해서 칠흡인 것이다. 여기서 흡(洽)이란 넉넉할 흡 또는 촉촉할 흡으로 흡족하다, 만족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담(美談)으로 꽃은 조금 덜 피었을 때가 아름답고, 과일도 조금 덜 익었을 때가 맛이 나고, 밥도 더 먹었으면 할 때 수저를 놓고, 세력은 남김없이 부리지 말며, 말은 하고 싶다고 다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대나무 컵에 물을 채워야 식성이 풀이고, 천석지기 부자이면서도 옆에 있는 한 마지기 땅에 더 욕심을 내듯, 욕심에는 끝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욕심은 무엇을 하고자하는 의욕으로 인간의 본능에 속하며 이 의욕으로 인해 인간은 문명을 창조하고 오늘날의 문명국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의욕은 문명의 반사작용으로 도리어 정도(正度)를 잃고 탐진치(貪瞋痴·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마음의 삼독(三毒)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의욕은 욕심으로 과욕으로 탐욕으로 변질을 하고 욕심의 형태도 가지각색으로 분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첫째 남은 어찌되던 나만의 이익을 위한 욕심이고, 둘째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욕심이다.
그래서 나온 신조어(新造語)가 ‘나만이즘’(Namanism)이고 ‘나도이즘’(Nadouism)이다.
그러나 욕심에는 좋은 쪽으로 욕심을 내는 원심(願心)이라는 것도 있다. 남을 나와 같이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의 소원을 이루고자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돈도 분수에 맞게 있어야 하고, 자식 교육도 잘 시켜야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내 자식만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원심이 아니다.
다시 ‘대나무 물컵’ 얘기로 돌아가자. 약수터에서 물 컵에 마실 만큼 물을 7분쯤 받아 마셨다면 이것은 마음에 여백을 둔 원심이다. 7푼은 물질이고, 그 위 3푼은 정신으로 채워진 여백(餘白)이다. 만약 컵의 반을 마셨다면 반은 물질이고 그 위 반은 정신으로 채워진 여백이다. 앞서 미국의 선교사들이 본 ‘대나무 물컵’은 채워질 물질만 생각했지 채우면 안될 여백의 중요성을 인식 못한 오류(誤謬)였다.
‘계백당묵’(計白當墨)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이 입버릇 삼아 한 말로 「동양화는 그린 부분보다 그리지 않은 공백 즉 빈자리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말만이 아니고 그는 그 빈자리에 도취, 그 빈자리에 일관하다가 그 빈자리를 후배에 물려주고 갔다.
이렇듯 서양화는 화폭의 전부를 빈틈없이 기름으로 채운다. 그러나 동양화는 빈자리를 많이 남겨 놓고 나머지를 물감으로 채운다.
오늘날 서구문명 만능의 풍토 속에서 이 ‘빈자리’의 여백 철학은 물질문명의 숨통을 터주는 신선한 공간이 아닐 수 없다.
며칠전 뉴욕 타임즈의 토론방에서 「미국은 물질을 사랑하고 사람을 이용하는 법 대신, 사람을 사랑하고 물질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여기서 물질을 사랑한다는 말은 물질숭상의 물신주의를 뜻하는 말이고, 사람을 이용한다는 말은 사람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수단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세상이 이렇게 되었기에 이런 얘기가 미국의 안방에서 토론의 대상이 된 것이다.
“대나무가 되려거든 죽창이 되지 말고 피리가 되라"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나라가 그리고 사람들이 피리가 되지 않고 죽창이 되고 있기에 우리 인간은 고달파왔고 지금도 고달픈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피리, 이것은 넘침 없는 대나무 컵이 지닌 숭고한 여백의 교훈과 함께 핵의 위험을 안고 있는 오늘날 국제사회의 고고한 울림이 되었으면 한다.
/ikhchang@aol.com
멤피스 한인사 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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