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순한 채식동물인 노루도 암컷들이 발정하면 수컷들은 머리통 터지게 박치기를 하며 싸운다. 이 노루들의 싸움의 특징은 그 목적이 뚜렷하다. 인정사정 없이 하는 박치기를 통해서 누가 다음 세대에 유전자(DNA)를 전달할 것이냐를 결정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승부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패자는 정확하게 물러난다.

이렇게 승패가 명확한 싸움이 인간세계에도 있었다. 일본의 사무라이가 그랬고, 미국의 서부 총잡이들이 그랬고, 영국과 유럽의 결투가 또 그랬다. 승패가 명확하기 위해서는 지는 사람이 명확히 지고 승복하여야 한다. 이런 문제 해결법이 남성문화의 특징이다.

이에 반해서 여성문화의 특징은 싸움이나 경쟁보다는 대화나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한 차원 더 높은 문화이다. 이어령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에 한국인의 싸움을 ‘군자의 싸움’이란 제목으로 쓴 글이 있다. “우리(한국인)의 싸움이 고양이 싸움과 같다고 하면 그들(일본인)의 싸움은 꼭 닭싸움과도 같은 것이다.

언제 붙고 언제 끝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돌연한 싸움이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피가 흐르게 되는 치열한 격투이며 승부가 확실한 싸움이다. -중략- 그것들에 비하면 담배를 피워가며 구경꾼의 효과를 생각하며, 또 장장 반나절이나 소비하면서도 결코 주먹은 ‘삿대질’나 하는 연출적 효과 이외로 별로 소용이 되지 않는 우리의 싸움을 보고 있으면 이 민족이 평화 민족이라는 말도 거짓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내게 들린 요점은 ‘평화 민족’보다는 우리네 싸움은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 긴긴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는 사람이 없고, 져도 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선거 이후에 깨끗한 승복과 축하, 덕담 그리고 승자를 중심으로 단합해서 단체와 나라를 이끌어가자는 승복은 별로 들어보지 못한다. 지난 대선 후에도 당선자의 승리를 축하하는 덕담보다는 자신의 부덕(不德)을 패인으로 강조하고 떠나자, 당 차원에서는 당선무효 소송까지 걸었었다.

야당이 승복하고 야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에게도 함께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가를 위하여 단합하자며 축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미국 선거 후와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금껏 야당을 지지한 1,000여만의 표를 무시하지 말라는 당부에 무게를 더 싣는 마지못한 미지근한 승복을 보이곤 한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곳에는 모두가 패자가 되지만, 승패가 명확해지고 승자 중심으로 단합하여 단체와 국가를 끌어가는 곳에는 모두가 승자가 되는 ‘윈-윈’의 미래가 있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홉스테드(Geert Hofstede) 박사는 그의 비교문화 저서인 Culture’s Consequence(문화의 유산)이란 저서에서 한국을 여성문화권으로 분류했다. 남존여비와 가부장 제도의 뿌리가 깊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여성문화로 보여졌는지? 한동안 이런 의문을 품고 사유하다 얻는 나의 결론은 한민족은 여성문화권에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점이다.

실은 여성문화도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전통적으로 결투, 명확한 승패, 그리고 깨끗한 승복에 익숙한 문화는 아니었다. 작은 단체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국내에서 해외동포들까지 한인사회가 흔히 싸움과 투쟁으로 점철되는 이유는 바로 명확한 승패와 깨끗한 승복의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하려면 선거(경쟁, 싸움)의 결과에 승복하고 승자를 중심으로 뭉치는 문화가 정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