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을 다 마치고 어머님께 돌아갑니다.” 당신의 묘비를 세우고 ‘꿈의 귀향’이란 시를 새겨 묘비명처럼 떠나온 자리로 뒤 돌아간 시인 조병화 선생님.
삶 자체를 시처럼 언어 속에서 동화하며 고독에서 이어 간 사랑을 노래한 선생님 1949년 시집 ‘버리고 싶은 우산’을 통해 문단에 나오신 이후 2001년 남은 세월의 이삭에 이루기까지 51권의 시집을 남기신 선생님의 주옥같은 작품은 3,000여권으로 한국 현대 문학사에서 사상 최다 기록이자 세계 시문학사이트에 기록될 업적을 남기신 선생님.
삶의 자체를, 시의 의미를 고독 속에서 언어로 걸러내어 이슬처럼 영혼에 치닫는 삶을 살아오신 선생님.
후진 양성에 생을 바치셨고 문학사에 공헌하신 선생님. 은퇴 이후 교향 안성에 자신의 호를 딴 ‘편운제’란 문학의 집을 지으시고 기거하시며 ‘나의 생애’ 삶의 노래를 만들며 후진들을 위해 ‘편운문학상’을 제정, 현재 11회를 이어 오고 있고 지난 2003년 3월 8일 생을 마감하면서 많은 서적의 인세와 전 재산을 후학들을 위해 헌납하시고 자연으로 돌아가신 선생님.
지난 1988년 가을 고국에 들른 길에 선생님을 찾아 뵙고 미주 이민문학의 발전을 위해 선생님의 시화전 전시회를 요청했고 선생님의 주옥같은 작품 40여 점을 재미시인협회와 남가주 서울 고등학교가 공동 주최하여 한국 문화원 강당에서 전시회 테이프를 끈을 때 몸이 불편하여 비행기를 탈 수 없어 개막식에 참석치 못한다고 국제전화 육성으로 울먹이시던 선생님의 자애로움에 참석한 문인들도 함께 눈물지었습니다.
이역만리 떨어져 계셨지만 미주한국문단 발전을 위한 선생님의 배려는 각별하셨습니다.
당시 한국문협 이사장으로 계시던 1990년 8월 제1회 한국문협 해외문학 심포지엄을 LA에서 개최하여 본국 문인들뿐 아니라 미주지역, 세계의 흩어져 있는 재외 한국문인들을 초청하여 축제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던 선생님.
그로부터 10년 후 2000년 7월 제11회 한국문협 심포지엄 성춘복이사장 때 특별 초청인으로 오셔서 발전한 미주문단의 현황을 들으시고 흐뭇해하시며 웃으시던 생전의 얼굴이 선하게 살아옵니다.
시인 조병화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이 남긴 업적은 한국 문학사에,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가셨지만 선생님의 체취는 미주 땅에도 유업처럼 선생님의 시화 한편 친필 해주신 시집 한 권, 선생님의 애장품, 육성녹음 테이프가 미주한인문단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생전 그렇게 아끼시다 병환으로 금연하며 제게 주신 파이프를 어루만지며 선생님을 곡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고이 잠드소서.
전달문
<시인·국제전 한국본부 미주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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