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도 우리 같은 한국 여자들이 좀 살텐데 신문에 한번 내봅시다."
1963년 봄. 지금은 라스베가스로 이주한 에드워드(Edward) 전씨가 국제결혼한 여자들 모임을 만들어 보자며 이근녀씨에 연락을 해왔다.
이씨의 집에서 두 사람은 커피 타임을 하면서 머리를 맞댔고 그해 7월7일 모두 6명이 처음으로 모였다. 이들은 에드워드 전씨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했다. 현 한미여성재단의 전신인 한미부인회가 탄생한 것이다.
창립 회원중 유일하게 현재까지 워싱턴에 거주하는 이근녀씨(68)는 당시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낯설고 물설은 객지에서 동포가 그리워 한곳에 모였지요. 그러나 단지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이들은 미 정착기에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갓 이민온 동포 여성들이 또다시 겪지 않게 하자는데 의기투합했다. 자신들처럼 국제결혼해 미국에 왔다 오갈 데 없어진 딱한 여자들을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아파트 구하기, 장보기, 살림 장만, 운전면허증 취득, 직장 주선, 초기 이민자들의 말못할 애환 뒤에는 늘 한미부인회가 있었다. 옷가지를 모아 병원이나 고아원에 전달하기도 하고 한인행사가 끝나면 노인들을 집까지 태워다주는 일도 이들의 몫이었다.
주미대사관도 이들의 봉사활동을 적극 도왔다. 유학생,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워싱턴 한인사회에서 한미부인회의 존재는 두드러졌다.
“당시엔 한식당도 없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모임을 했어요. 연 2회 대사관에 초청받아 떡국도 먹고… 참 가족적이었지."
2기인 박귀복씨(71)는 말을 잇는다. “한국에 있는 아메리샨(혼혈아)들을 아버지의 나라인 미국으로 초청하는 일도 벌였어. 40명인가, 가족을 포함해 그렇게 80여명이 미국으로 이민왔어. 그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야."
무엇보다 한미부인회의 공은 이민의 징검다리역을 통해 워싱턴한인사회의 산파역을 맡았다는 것. 지난 40년동안 이들이 초청한 가족들만 수천명. 이들을 통해 또 수만명이 태평양을 건넜다.
창립 스무해를 바라보며 위기가 찾아왔다. 회원들간 틈이 생기면서 분열됐다. 한쪽은 워싱턴여성회로 분리해나갔다.
“가장 가슴아픈 일이야. 아직도 못잊겠어." 이근녀씨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는다.
1984년 3월19일 한미부인회는 이름을 한미여성재단으로 바꾼다. 미연방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불우여성들을 위한 핫 라인 전화 개설과 상담, 남편에 학대 받는 여성들을 위한 보호소 설립등 봉사와 교육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을 펼친다.
회원들은 주머니를 털고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내놓고 하면서 40년간 봉사의 한길을 달려온 이정표를 세웠다.
한미여성재단은 오는 4월5일 스프링필드 힐튼호텔에서 40주년 기념식을 갖는다. 미 주류사회와의 징검다리 역, 여성들의 권익옹호를 위해 달려온 한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다.
“ 이젠 제발 편견 좀 버려줬으면 좋겠어." 박귀복씨가 볼멘 소리를 꺼낸다. 국제결혼한 여인이란 일부 한인들의 편견이 자못 서운했던 모양이다.
동석한 실비아 패튼 현 회장이 말을 이었다. “선배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으면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겠습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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