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울음으로 시작해 울음으로 그 삶을 마감한다. 삶을 엮어가며 한 사람이 흘려야 하는 눈물을 모두 주워 담는다면 도대체 몇 사발이나 될까? 동해바다, 태평양도 모두 태고 때부터 흘린 인간의 눈물이 모여 고인 것이 아닐까.
같은 울음이라도 첫 번째 울음과 두 번째 것은 현저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자신의 울음이요 후자는 타인의 울음이다. 하나는 무의식이요 다른 하나는 의식적이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의 울음이다.
첫 번째 울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따뜻하고 아늑한, 그러나 칠흑같이 어두운 아기집에서 밀려나며 갑자기 쏟아 내리는 눈부신 빛살에 질려서일까? 아니면 앞으로 닥쳐올 인생살이의 고달픔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한 선각과 예지, 아니면 인생에 향한 본능적 두려움이 울음으로 표출되는 것인가?
아기는 우주인이라도 되는 양 탯줄에 매달린 채 밀려나는 세상에 반항하듯 손발을 허공을 향해 휘저으며 ‘으앙’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 후 인생의 긴 여정의 스타팅 라인에서 서서히 유영을 시작한다. 길고 긴, 그리고 고달픈 인생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두 번째 울음은 그 인생 여정의 끝에서, 조물주께서 입력시켜 주신 핵전지의 수명이 다해 꺼져 가는 기력,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더 이상 곡할 기력도 없어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의 구성진 조곡을 들으며 서서히 깊고 은밀한 죽음의 나락으로 침전한다.
어머니, 그 분은 내 인생의 태초에 내 울음을 처음 들어주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의 임종을 위해, 어머님의 가물거리는 의식을 향해 마지막 조곡을 헌정해야 할 존재이다. 그런데 나는 그럴 기회를 상실했다. 여덟 살 철부지 나이에 어머니도 고향도 한꺼번에 잃고 부평초 되어 지구촌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았다.
나는 해마다 오월이면, 소복차림에 흰 두건을 쓰신 어머님이 다소곳하게 베틀에 앉아 베를 짜시던 모습을, 반세기 넘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스라이 뇌리 속에 되살린다. 한 필의 탁탁한 광목을 짜기 위해 어머님은 도대체 얼마나 허다한 세월을 인고로 엮으며 그 몇 번이나 북을 날 틈새로 밀어 넣는 작업을 반복하셔야 했을까! 어머님은 도대체 얼마나 허다한 인고의 세월을 하얗게 삭이며 등과 이마에 촉촉이 밴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쑤시는 삭신의 고통을 참아야 하셨을까!
지금도 눈감으면, 하얀 무명치마 저고리에 흰 수건 쓰신 채 고개 숙여 말없이 베틀 앞에 앉으신 어머님 외로움 서린 모습 아슴푸레 망막을 채운다.
그때의 어머님처럼 나도 인생의 베틀 앞에 앉아 부지런히 삶을 직조하리라. 달고 쓴 삶의 씨줄을 세월이란 이름의 인고의 날줄 틈으로 밀어 넣어 인생이란 이름의 천을 촘촘히 짤 것이다. 오래 전 어머님께서 나를 위해 짜셨던 입성감의 촘촘하고 실한 올에 견줘 손색이 없을 그런 천을, 땀을 섞어 올올이 직조하리라.
배시언 뉴저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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