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내 아래위를 훑어보면서 “당신 한국 사람이오?”하고 물었다. 그 묻는 태도가 무척 불쾌하였으나 “그렇소, 남한에서 왔소”라고 대답을 했다. 근래에 이북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불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내가 남한에서 왔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북과 전연 관련이 없는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가지고 시비를 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왜 그러냐?”고 묻기에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하였더니 또 묻는 것이었다. “너, 왜 내가 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지 아느냐?”고. 바로 그 때였다. 그 노인의 연령을 짐작해보며 6.25가 머리에 떠올랐다. 최근 한국에서 있은 반미 촛불시위와 성조기를 태우면서 미군 철수를 외치는 사태가 미워서 나를 욕하고 싶은 그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때야 비로소 그 노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싸우다가 다리 하나를 잃은 것을 알았다. 정중하게 사과를 하면서 한국인들 전체가 그런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님을 `상자 안에 썩은 사과 한 개’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설명했다.
미주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반미감정이 전연 없다는 것과 우리도 그 노인과 다름없이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였다.
눈물이 많은 나는 가끔 그 옛날을 생각하면서 울 때가 있다. 1950년 12월, 1.4후퇴 직전, 나는 인천 부두에 나가 철조망이 없는 미 해군들의 숙소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마침 천막 안에서 키가 큰 수병이 밖으로 나왔다가 초라한 내 모습을 보고 손짓으로 오라고 하기에 나는 쏜살같이 그리로 달려갔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나의 모습을 금방 알아차린 그 수병은 나를 따스한 스토브 앞으로 안내하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었다.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은 없으나 잊을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무렵에 노랗고 네모난 큰 깡통을 따서 열더니 크게 자른 고기를 난로 위에 놓인 넓적한 냄비에 구워 자기가 하나를 먹으면서 다른 하나는 나를 주는 것이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든지, 그 맛을 지금도 기억하며 스팸을 먹을 때마다 옛날 그 수병을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곤 한다.
그 수병은 그 날 나에게 큰 통조림 고기를 주면서 캄캄한 추운 밤에 나를 무등 태우고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었고 초라하고 차디찬 가마니 바닥의 방에 들어와 내 부모님 그리고 내 동생과 말은 못하고 몸짓으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그 때 따스한 차 한잔도 대접을 못한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었으나 내 마음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음은 그 수병이 우리를 그토록 편안하게 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름 모를 그 수병은 지금도 우리와 같이 미국 하늘 밑 어느 곳에 살고 있을 터인데 만날 길이 없다. 나는 그의 고귀한 사랑을 영원히 잊지 않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살 것이다.
곽건용/코네티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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