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경<국제회의 통역사>
통역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쉽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어떤 존칭을 사용해야 할지 막막해서 머뭇거려지고 어색한 분위기만 조성되는 때가 적지 않다. 통역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의 입장에서 아시아나 항공 승무원처럼 깍듯이 예우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나보다 제법 나이가 많이 어린 사람들을 위해 통역할 때 선생님하고 부르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실히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면 학생이라고 부르고 이름을 아는 경우엔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부르지만 둘 다를 모르는 경우엔 마땅한 존칭이 없는 것이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로 시작되는 유치한 유행가의 가사처럼 성과
직업/직함을 모를 때에는 어떤 존칭을 써야 할지 막막해진다. 명함을 부탁하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에서이다. 성과 직함이 들어간 명함을 받으면 김부장님, 이과장님 등의 존칭이 쉽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문화의 한 부분인 언어가 문화에 의해 지배되는 대신 주객전도 격으로 우리의 복잡한 존칭(언어)이 우리 문화를 숨막히게 하고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름을 교환하는 것보다 먼저 확인되어야 하는 것은 서열이다. 나이를 알아야 위아래가 분명해지니까 당연히 나이가 여기서는 상당히 중요해진다.
외국사람이 어떤 한국 남자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형님이라고 가르쳐주었단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확실하게 성립된 서열체계가 술자리에서 술로 인해 무너져서 벌어지는 싸움도 잦다. 법정에서도 그런 사건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존칭이 없거나 분명치 않으면 자연히 사람 관계도 껄끄럽고 어색해지며, 한마디로 가까워지기가 힘들다. 나의 바램은 미국에 사는 교포들만이라도 영어명이 있으면 그냥 그대로 부르든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쓸데없이 너무 친근한 느낌을 주어 어색하다면 씨를 붙여 로라(씨), 죠지(씨), 하이디(씨) - 호박씨나 수박씨를 연상하게 할지라도 - 등으로 불렀으면 한다.
성과 직함을 공손하게 불러도 어떻게 일일이 승진된 때를 알아서 그때마다 다른 존칭을 붙여준단 말인가. 이름 뒤에 간단히 씨만을 붙여 서로를 부르는 운동을 교포사회에서나마 펼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노재경씨, 박은희씨, 김민기씨 등등. 그러다 친해지면 성은 빼고 재경씨, 은희씨, 민기씨 등으로 부르고. 이렇게 부름으로써 좀더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노선생님, 강국장님, 이기자님, 박대표이사님, 김교수님 하고 시작하는 대화는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진솔한 대화가 끼여들 틈이 전혀 없는 듯하다는 느낌을 나만이 받지는 않을 상 싶다.
존칭때문에 가까워질 수 없는 우리가 되는 대신 쉽게 서로를 부름으로써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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