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 엘레지
꽃샘추위가 심통을 부려도 스캐짓 밸리의 튤립은 어김없이 만발했다. 시애틀의 봄철 필수 관광코스인 이곳은 서울손님들을 안내하기에 제격이다. 형형색색 펼쳐진 광대무변의 파노라마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한국에선 볼 수없는 장관이기 때문이다.
튤립이 진 뒤엔 스페이스 니들이나 풍광 좋은 레이니어 국립공원 등지가 주요 관광코스지만 요즘 서울사람들은 별로 눈에 차지 않는 눈치다. 콧대 높은 서울손님을 기죽게 만들 수 있는 곳은 따로 있다. 퓨짓 사운드에 그림같이 뜬 페리를 태워주는 것이다.
서울사람들이 흔히 “미국에 없는 것도 한국엔 있다”고 떠벌여도 수백대의 자동차와 승객을 함께 나르는 페리는 없다. 앞으로도 없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만년설 덮인 고봉과 도심의 스카이라인, 운수 좋으면 만날 수 있는 범고래 떼 등 페리에서 둘러보는 주위경관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좀체 경험할 수 없다.
퓨짓 사운드엔 각급 페리 28대가 10개 노선을 연중 운항한다. 덩치가 가장 큰 놈은 시애틀-베인브리지 섬 노선의 타코마 호와 퓨얄럽 호(선체길이 460피트)이다. 각각 승객 2,500명, 자동차 202대를 한꺼번에 실어 나른다. 계절별로 운항시간 및 운항횟수가 달라지는데. 성수기로 접어드는 봄철 스케줄은 2주전인 3월 마지막 일요일(28일)에 시작됐다.
페리마다 이름이 독특하다. 야키마, 웨나치, 스포켄, 왈라왈라, 스텔라쿰, 엘와 등 원칙적으로 인디언의 인명이나 지명이다. 예외는 워싱턴주의 별칭을 딴 ‘에버그린 스테이트’호와 워싱턴 주꽃 이름을 딴 ‘로도덴드론’호 두 척뿐이다. 최근 새로 건조한 소규모 페리의 이름도 중학생들의 공모를 통해 ‘쿠와디 타베일’(작은 배)이라는 인디언 말로 정했다.
이들 페리의 소유주는 워싱턴 주정부이고 교통부 산하 페리국(WSF)이 운영총책이다. 미국 최대 규모의 이 페리체계를 통해 연평균 2,600만 명의 승객과 1,100만대의 차량을 수송한다. 샌환 군도 주민들이 바깥출입을 하려면 경비행기나 자가용 보트 외에 페리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나코테스에서 캐나다 BC주의 시드니로 연결되는 국제노선도 있다.
워싱턴주 페리의 원조는 19세기말~20세기초 퓨짓 사운드를 누빈 민간 운수회사의 통통배들이다. ‘모기 선대’로 불린 이들 민간회사 가운데 퓨짓 사운드 항해사(PSNC)와 킷샙 카운티 수송회사(KCTC)가 1930년대 초까지 남았다가 KCTC는 1935년 노조파업으로 문을 닫았고, ‘블랙 볼 해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PSNC도 1940년대 말 노조의 임금인상 압박에 시달려 주정부에 요금인상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가 퇴짜 맞자 문을 닫았다.
주정부는 1951년 ‘블랙 볼’의 모든 증기선을 요즘 페리 한 대 가격의 20분의1도 안 되는 500만 달러에 인수했다. 애당초 주정부는 퓨짓 사운드 이곳저곳에 다리를 건설할 계획으로 이들 통통배는 그때까지만 운행할 속셈이었다. 그러나 내해의 수심이 워낙 깊고 해저계곡의 경사도 가팔라 교량건설을 포기한 채 그동안 페리체계를 계속 개선, 확장해왔다.
서울손님들에게 색다른 인상을 안겨줄 로맨틱한 페리도 알고 보면 속병을 앓는다. 지난 2000년 이후 탑승객이 11%나 줄었다. 요금수입과 주정부 지원금으로는 운영경비의 74%밖에 충당할 수 없다. 채산이 맞는 노선은 시애틀-베인브리지 및 에드먼즈-킹스턴뿐이다. 승객전용 페리 두 척을 싸게 팔려고 이베이에 올려놨지만 임자가 나서지 않는다.
재정적자에 쪼들리는 주정부는 페리운영 지원금을 계속 삭감할 채비이다. 페리요금이 더 오르고 운항 횟수도 줄어든다는 뜻이다. 서울손님으로부터 “고작 몇 십분 타려고 한나절 기다리게 하느냐”는 핀잔을 듣게 될 터이니 그나마 페리구경도 못 시켜주게 생겼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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