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산
만년설 덮인 레이니어 산의 위용은 새벽에 가장 또렷하게 보인다. 날씨가 유난히 좋았던 사흘 전 출근길에도 동틀 녘 하늘에 양각된 눈산이 차창에 꽉 차게 들어왔다. 늘 봐오는 모습이지만 왠지 그날은 감회가 달랐다. 온종일 눈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눈산은 필자의 칼럼과 인연이 깊다. 그래서 칼럼 타이틀이 ‘눈산 조망대(眺望臺)’이다. 정확하게 3년 전 첫 칼럼이 게재됐다. 이번 주 칼럼이 154번째이다. 3주년이면 156번째라야 맞지만 그동안 토요일이 공휴일과 겹쳐 두 번 휴간되는 바람에 154번째가 됐다.
장엄한 레이니어를 매일 바라보는 축복을 누리며 눈산이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준 시애틀 지역 한인들은 철따라 고사리나 송이를 따러 이곳에 곧잘 찾아가고, 한국서 온 친지들도 즐겨 안내하지만 정작 이 명산에 관해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듯하다.
레이니어(해발 14,411 피트, 4,392m)는 알래스카의 맥킨리(20,320 피트)를 제외하고 미국 본토에서 두 번째로 높다. 캘리포니아의 휘트니(14,505 피트)보다 불과 94 피트 낮지만 약 5,000년 전 정상이 무너져 내리기 전까지는 16,000여 피트의 당당한 최고봉이었다.
레이니어는 뾰족한 휘트니보다 몸집이 훨씬 뚱뚱하다. 주변 둘레가 100마일에 달한다. 온 산에 25개의 빙하가 36 평방피트를 뒤덮고 있으며 그 얼음두께가 평균 100피트나 된다. 본토 내 최대 빙하산인 레이니어를 한인들이 눈산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눈산의 본래 이름은 레이니어가 아니었다. 이 산 주위에서 수천년 동안 사냥하고 딸기 따며 연어를 낚아온 니스콸리, 야키마, 퓨얄럽, 머클슈트, 러슈트시드 등 인디언 원주민 부족들은 이 산을 ‘물의 어머니’라는 뜻인 ‘타코마(또는 타호마)’로 불렀다. 수많은 강이 이 산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타코마는 스캐짓 인디언부족 말로는 ‘흰 산’을 뜻하기도 한다.
시적인 타코마를 썰렁한 레이니어로 둔갑시킨 장본인은 1792년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워싱턴주를 탐험한 영국인 조지 밴쿠버였다. 그는 이 멋진 산에 친구인 영국해군 제독 피터 레이니어의 이름을 붙였다. 그 후 타코마 이름 회복운동이 몇 번 시도됐지만 실패했다.
해마다 8,000~1만3,000명이 눈산에 도전하고 이들 중 90%가 남동쪽 ‘캠프 뮈어’ 코스를 선택한다. 전체 도전자의 절반가량은 날씨나 빙하상태 때문에 정상정복에 실패한다. 해마다 평균 3명이 목숨을 잃는다. 1981년엔 11명이 빙벽에서 한꺼번에 떨어져 사망했다.
필자는 눈산을 4년 전 여름 처음 올랐다. 시애틀 한인등산회 ‘에이스’ 회원 10명과 캠프 뮈어(10,118 피트)까지만 갔다. 얼음 비탈길을 3시간가량 계속 오르자니 죽을 맛이었다. ‘쩡’하며 빙벽 갈라지는 소리에 기가 질렸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두 다리에 동시에 쥐가 나는 바람에 20여분간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다가 기다시피해서 겨우 캠프에 도달했다.
그 후 약 8개월이 지난 2007년 4월21일자 본보에 첫 ‘눈산 조망대’ 칼럼이 게재됐다. ‘지옥에의 도전’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칼럼에서 필자는 눈산을 오르는 각오로 칼럼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매주 칼럼을 쓰는 일이 얼음길 등반 못지않게 힘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인 등산회는 지난 4년간 4배 이상 커져 등록회원 수가 100여명을 헤아린다. 해마다 새 회원들이 중심이 돼 한 차례 이상 캠프 뮈어를 오른다. 상당수가 여성회원들이고 필자 또래의 중노년층도 낀다. 이미 정상을 한 차례 이상 정복한 에이스 회원이 5~6명에 이른다.
오늘 아침에도 한인 등산회원 20여명이 올 들어 처음 눈산을 오른다. 등산회에서 ‘눈산’이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필자는 오늘 눈산 등반팀에 끼지 못했다. 무릎이 약해진 탓이다. 그래도 한번은 더 오를 참이다. 눈산을 오르는 각오로 칼럼을 쓰기 시작했던 3년 전과 정반대로 칼럼을 쓰는 각오로 눈산을 오르면 못 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윤여춘(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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