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여건 괜찮은데도 지출 수년째 감소 … 유럽 위기극복에 걸림돌
독일의 무역상대국들은 독일이 소비를 촉진하고 수입을 늘려 그리스와 스페인 같은 국가들이 성장을 통해 국가채무를 하루속히 갚을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유럽 경제회복을 위해 독일에 의존해야 한다는 입장은 별로 좋은 아이디어로 보이지 않는다.
노령화 따른 은퇴대비 저축이 원인
소비촉진 위한 정부시책 별무 효과
월마트 등 소매체인들 적자 경영
독일에서는 경제위기가 닥치기 훨씬 전부터 소비자 지출이 감소해왔다. 지난 10년간 소매상들은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갭과 마크스 & 스펜서, 그리고 심지어 월마트조차 독일에서는 흑자경영에 실패하고 있다. “독일 소비자들은 호황기에도 지출 파티에 뛰어들지 않았으며 지금은 더욱 더 그렇다”고 소매상 경기를 조사하는 데이터 회사인 마르킷의 수석 경제학자 크리스 윌리엄슨은 말했다.
독일의 소매 매출은 그리스 채권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이전인 지난 2006년 이후 계속 내리막이다. 4월 소매판매가 3월보다 1% 늘긴 했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3.1%가 줄었다. 독일인들은 다음 위기에 대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지독한 구두쇠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사람들은 경제위기 속에서도 소비를 계속했으며 유럽 전체로 볼 때도 소비가 줄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EU 자료에 따르면 독일은 65세 이상 인구가 가장 급속히 늘고 있는 국가이다. 이런 인구 구성은 가구 같은 큰 물품 구입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인들은 전통적으로 이웃 국가들보다 저축을 더 많이 하며 수입보다 수출을 더 한다.
티모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과 프랑스 재무장관은 독일에 대해 국민들의 소비를 촉진하고 예산을 너무 긴축해서는 안 된다고 촉구한다. “긴축예산은 성장 친화적이어야 한다”고 가이트너 장관은 최근 한국 부산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말했다. 하지만 앙헬 메르켈 독일총리는 이에 아랑곳 않고 오는 2014년까지 지출을 850억유로(1040억달러) 줄이겠다고 밝혔다.
가이트너의 발언은 유럽이 현재의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을 반영한다. 일부 정치지도자들과 경제학자들은 긴축과 내핍이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인사들은 재정문제가 없는 국가들도 예산을 긴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다. 이들은 독일인을 비롯한 유럽인들은 유럽대륙이 재정 파탄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들 때에 비로소 샤핑몰을 찾기 시작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마켓 조사기관인 GfK의 소비자 조사책임자인 롤프 뷔르클은 “부채 위기는 불안감을 만들어 냈다”며 “정치지도자들이 상황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독일의 소매상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인구학적, 경제적 추세는 프랑크푸르트 동쪽에 소재한 노동자 커뮤니티인 하나우에 가보면 그대로 확인된다. 최근의 어느 따스한 날 한 노인이 하나우의 보행자 구역의 절반을 차지하는 카르스타트 백화점이 있던 곳의 유리창 앞을 보행기에 의지한 채 지나갔다. 한때 독일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었던 카르스타트는 파산에서 벗어나는 과정의 하나로 수익이 가장 낮은 이곳의 매장을 닫았다. 로고가 뜯겨진 회색빛 벽에는 미국의 래퍼인 Unk의 공연 포스터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스포츠 용품점이 들어서 있던 그 옆 공간에는 저가할인 판매업소가 새로 들어섰다. 이 상점에서는 가방에서부터 월드컵 기념품, 목각 고양이에 이르는 잡다한 상품들을 판매한다. 인근 상점들은 카르스타트가 만들려 하던 고급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중고 의류 판매점과 매니큐어 살론 등이 들어서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야 할지 몰라한다”고 지나던 행인은 말했다. 이 행인은 마치 비밀을 털어놓듯 목소리를 낮추며 몇 블럭 떨어진 곳에 다른 백화점이 있는데 영업이 신통치 않다고 들려준다.
설사 독일 지도자들이 소비촉진을 위한 방안을 시행하더라도 감세를 비롯한 정부 부양안이 하나우 같은 곳의 소매상들의 매출을 크게 늘려 줄지는 의문이다. 독일 국민들의 소득은 수년 째 정체상태이며 노령화 되는 국민들은 은퇴를 위한 저축에 열심이다.
사실 감세는 정부의 은퇴연금 기금이 줄어들지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내 오히려 역풍을 초래할 수 있다. 독일 연금제도를 연구하는 이탈리아 밀란 대학의 프란세스코 지아바지 교수는 “사람들은 ‘내가 90살이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지? 저축을 시작해야 해’라고 말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은행 관계자들은 내핍만이 국민들의 신뢰를 높인다며 동의한다. 유럽 중앙은행장인 장 클로드 트리셰는 “재정 긴축은 성장에 부정적이라는 견해는 너무 편협하다”고 말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무역흑자 때문에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수입을 수출과 맞추기 위한 뾰족한 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수출을 줄여 수입과 맞춘다는 것은 넌센스”라고 베를린에 소재한 독일 경제연구소의 경제학자인 크리스턴 드레거는 말했다. 그는 독일 정부가 창업을 손쉽게 하고 경쟁을 저해하는 장벽들을 제거해 전체적인 수요를 늘려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부터 직접적인 부양책을 시행하고 있다. 페이롤 공제를 줄이고 육아보조를 늘린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은행의 한 관계자는 “가처분 소득을 늘려 준 것”이라고 말하고 “하지만 독일인들은 이 돈을 저축해 부양효과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자동차 구입시 현금보상 프로그램으로 지난 해 차량 판매가 치솟았지만 인센티브가 끝나자 2010년 첫 4개월 동안 판매가 25.5%나 곤두박질 쳤다.
GfK에 따르면 독일인들의 6월 소비자 신뢰지수 전망치는 5월의 수정치 3.7에서 3.5로 하락했다. 소비자신뢰지수 전망치는 지난해 11월부터 5개월 연속 떨어진 뒤 4월에 전달과 같은 수준을 나타냈고, 5월에는 예상보다 큰 폭으로 상승했으나 그리스 재정적자로 인한 유럽의 금융 불안으로 한 달 만에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GfK의 소비자신뢰지수는 소비자 2,000명을 대상으로 기대 소득, 경기 전반에 대한 전망, 주요 제품의 구매 의사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산출한다.
소비자 신뢰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래의 취업전망이다. 조사기관에 따르면 한사람의 실업은 가족이나 친구 중 3명의 소비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경제위기로 독일의 실업률은 올랐지만 정부의 기업 보조 프로그램 등으로 미국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이런 조치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궁극적으로 소비를 위한 가장 좋은 요소는 취업전망이다. 임금과 기대를 높여주기 때문”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한 경제전문가는 “최악의 상황은 끝났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득시키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 본사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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