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는 공화당의 조지 W. 부시에게 전국 득표에서 54만표를 앞섰음에도 패배했다. 승자독식을 원칙으로 하는 선거인단이라는 미국만의 독특한 선거제도가 낳은 민의의 왜곡이었다.
전국 득표와 선거인단 집계에서 뒤지던 부시에게 승리를 안겨 준 곳은 플로리다였다. 부시는 막판 플로리다주의 선거인단 25명을 가져가면서 억지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부시가 고어보다 더 많이 얻은 표수는 단 537표. 불과 수백 표에 의해 세계 최고 권력의 향방이 갈린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권력의 향방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2000년 대선에서 플로리다주 어느 대도시 한인들이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고 이들의 표가 한쪽으로 집중됐더라면 이후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부질없지만 이 같은 상상을 해 본다. 지나고 나서 손쉽게 해 보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전혀 있을 수 없었던 시나리오는 아니다. 이처럼 2000년 미국 대선은 한 표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정치 드라마였다.
대표를 뽑아 국민들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하는 대의 민주주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구성원들의 정치참여 역시 크게 흔들리고 있다. 겉으로는 국민들의 뜻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의 지배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감추어진 얼굴이다.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투표율은 대의 민주주의가 겪고 있는 위기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나마 낮은 투표율을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왜 대의 민주주의가 흔들리게 됐는지 보다 분명해진다. 서구와 한국의 투표율은 평균적으로 50% 정도 수준이다. 그러나 평균이라는 말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세대별로는 말할 것도 없고(젊은이들보다는 노인층이 훨씬 많이 투표한다) 계층별로도 심각한 비대칭이 나타난다.
부자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투표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최근 한국에서 실시된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단적인 예이다.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강남 3구의 투표율은 강북지역을 훨씬 상회했다. 기득권층은 지켜야 할 것이 분명하고 큰 까닭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계층은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왜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삶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기회인 투표에 무관심하고 소극적인 것일까. 이들에게 변화와 개선은 손에 쥘 수 없는 막연한 어떤 것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절망감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런 무력감을 심어주는 것은 권력을 유지해 가기 위한 보수의 핵심 전략이기도 하다.
또 부자들은 철저하게 계급 투표, 즉 ‘유물론 투표’를 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욕망 투표’를 한다. 사회적 약자임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세력이 아니라 자신들이 동일시하고 싶은 대상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다. ‘부자 정당’ 소리를 듣는 미국의 공화당과 한국의 한나라당 지지자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양극화 같은 사회적 부조리와 불합리는 정당성을 얻어 나간다.
금년에는 큰 선거들이 잇달아 치러진다. 미국에서는 11월 대선과 연방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한국에서는 4월 총선에 이어 12월 대선이 치러진다. 가히 ‘선택의 한해’라 할 만하다. 그런 만큼 우리 모두가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미국 신문에 실린 한 만평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해피 일렉션 이어!(Happy Election Year!). 투표를 통해 내 의사를 드러낼 모처럼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메시지가 확 와 닿는다.
한 표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인종도 계급도 성별도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던 무력감을 떨쳐내는 각성이 중요할 뿐이다. 지난 주 세상을 떠난 민주당 김근태 고문은 숨지기 전 자신의 블로그에 “오로지 참여하는 사람들만이 권력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권력이 세상의 방향을 정할 것”이라는 마지막 글을 남겼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시대의 흐름에 그냥 떠밀려 내려가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물길의 흐름을 바꾸는 작은 조약돌이 될 것인가. “나 하나쯤이야”라는 무력감과 게으름이 고개를 든다면 2000년 플로리다를 기억하기 바란다. 다시 한번 해피 일렉션 이어!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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