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보수라 여기는 한국인이 지난 몇 년 사이에 급속히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일보가 실시한 국민의식 조사에 따르면 자기의 이념적인 성향을 보수라고 밝힌 사람은 7년 새에 28.3%에서 19.8%로 급감했다. 지난 대선 이후 기세등등하던 보수 세력에는 충격으로 다가올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보수 외면은 확연하다. 가히 보수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보의 포퓰리즘 책략에 어리석은 국민들이 말려들고 있다고 강변하고 싶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수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민심을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보수를 앞세워 정치적으로 재미를 봤던 정당이 정강에서 보수라는 표현을 삭제할지를 놓고 한바탕 내홍을 겪은 것은 위기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수에게는 황당한 상황이겠지만 다른 누구를 탓할 일이 전혀 아니다. 보수이기 때문에 버림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수가 보수답지 못하기 때문에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다.
한국의 보수는 진정한 보수가 아니다. 한국의 주류 보수는 친일에 뿌리가 닿아 있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세력이 보수라는 이름의 배로 갈아탄 것뿐이다. 이런 사실은 현 정권 출범 후 마치 한국사회를 자신들이 접수하기라도 한 듯 설쳐대고 있는 ‘뉴 라이트’의 몇몇 주장만 들여다봐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일제 때의 근대화가 한국경제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신봉자들이다. 일부 뉴 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심지어 군대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증거가 없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한다. 완전히 일본 극우의 판박이다. ‘뉴 라이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내용물은 여전히 ‘올드 라이트’다.
그렇다고 일본 극우가 보여주는 민족의식이나 자주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뼛속까지 친일이니, 친미니 하는 말을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쉽게 내뱉는다. 그러니 실용과 경쟁력을 내세우며 어떤 소설가가 줄기차게 설파하고 있는 영어 공용어화론 같은 이상한 주장들이 나오는 것도 별로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지배적인 보수는 극우를 닮았으면서도 극우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함량미달 이념이다.
진정한 보수는 올바른 역사인식과 강자의 약자에 대한 배려를 기본 가치로 한다. 나치 지배로부터 해방된 프랑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치 부역자 청산이었다. 청산을 주도한 사람은 보수주의자 드골이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 일에 실패함으로써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세력이 오히려 보수의 주류를 장악하는 전도현상이 일어났다. 한국의 보수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떳떳치 못한 뿌리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극심한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양극화가 초래된 데는 많은 원인들이 있겠지만 보수 기득권층의 욕심을 빼놓을 수 없다.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인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개인적인 적선이나 시혜가 아니라, 공정성과 정의를 세워나가려는 기득권층의 열린 가치관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배 계층은 이런 점에서 지나치게 인색하고 닫혀 있다. 민심의 보수 이탈은 이런 욕심을 오랫동안 봐 온데 따른 자연스런 현상이다.
세계 최초로 복지국가를 만든 것은 이름난 보수주의자인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였다. 당시 독일은 사회주의 세력이 가장 강한 나라였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복지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혜안을 가진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당장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조금은 길게, 그리고 넓게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화장을 지운 한국 보수의 생얼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보수주의’라기보다는 ‘보신주의’에 가깝다. 미숙아가 힘센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는데 권력의 칼자루를 쥔 미숙한 보수를 지켜보는 심정이 꼭 그렇다.
한국의 보수는 현재 변신의 몸짓을 하고 있다. 그러나 표를 얻기 위한 일시적인 눈속임이어서는 곤란하다. 뼛속까지 친일하고 친미만 할 것이 아니라 뼛속까지 보수의 진정한 가치를 새겨 참다운 보수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보수를 보고 싶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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