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신이 새들의 나라를 다스릴 왕을 뽑기 위해 지원자를 물색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평소 다른 새들에게 무시당해온 까마귀는 이번 기회에 왕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까마귀는 숲속 이곳저곳을 뒤져 다른 새들이 떨어뜨린 깃털들을 모은 후 이것으로 자신을 치장했다. 검은 색을 아름다운 깃털로 감춘 까마귀는 제우스의 눈에 들었다. 그가 왕으로 지명되려는 순간 까마귀의 꼼수를 눈치 챈 다른 새들이 까마귀 몸에서 각자의 깃털을 뽑아냈다. 본래의 모습을 숨기고 왕이 되려던 까마귀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본색은 감출 수 없다는 교훈을 던져주는 이솝우화다. 본색이란 본디의 특색과 정체성을 말한다. 오랫동안 언행과 생각으로 굳어진 밑바탕이기 때문에 쉬 변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이것을 잠깐 감추어야 할 상황과 필요가 생기기는 하지만 본색 감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밥 먹듯 하면서 그런 재주를 잘 활용해 개인적 이익과 명예를 추구하는 부류들이 있다. 바로 대중 정치인들이다. 대개의 정치인들은 별다른 갈등 없이 자신의 속내와 다른 언행을 하는데 아주 탁월하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말은 겸손해지고 자세는 낮아진다. 예외 없이 서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사들이 표가 필요할 때면 시장 통에 나가 어묵을 사먹거나 상인들의 비린내 나는 손을 잡는 이벤트를 연출하며 서민행세를 한다.
지난 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왔던 여성후보도 남대문 시장을 찾는 등 다양한 쇼맨십으로 자신을 서민친화형 후보로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은 서민들과 동떨어져 있음이 드러나면서 유권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한 전직 보좌관은 이 정치인이 “내가 시장에서 옷을 사 입을 수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란 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것이 본색이다. 본색을 일시적으로는 감출 수 있지만 결국은 드러나게 돼 있다.
미 대선 공화당 경선에서 돈과 관련한 잦은 실언으로 곤욕을 치른 미트 롬니도 본색 감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준다. 2억달러 재산가인 롬니는 보통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지만 후보토론회 중 즉석에서 1만달러 내기를 제안하는 등 여러 차례 부자본색을 드러내 구설에 올랐다. 롬니의 부인도 “우리는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등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그 남편에 그 아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99% 미국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절대로 부자 티를 내지 않도록 몸을 낮춘다는 것이 롬니 진영의 기본적 전략인데도 그는 실언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어리석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다. 마음속에서 어떤 것을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반동의 힘은 더 커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트레스에 자극을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이 튀어나와 버린다.
하버드대학 연구진이 일단의 실험지원자들에게 몇 분 동안 아무 말이나 마구 해 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단 ‘하얀 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도 떠올리지 말라는 주문과 함께였다. 그랬더니 실험참가자들은 하얀 곰에 대해 생각을 안 하기는커녕 평균적으로 1분에 1번꼴로 이 단어를 입에 올리더라는 것이다. 억압하고 숨기려 하면 할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밖으로 더 드러내게 된다. 롬니의 실언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밑바탕을 숨기려 드는 정치인일수록 본색은 더 드러나게 돼 있다. 그럼에도 유권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엉뚱한 것에 눈이 팔려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한국 대선에서 유권자들은 유력 후보의 본색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는 캠페인 기간 중 화려한 깃털 뒤에 가려진 본디의 밑바탕과 수준을 얼핏얼핏 드러냈지만 허황된 약속에 미혹된 유권자들 눈에는 이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뽑아놓고 나서 “속았다”며 장탄식해 봐야 때는 이미 늦었다.
선거는 민의를 대변할 인물을 뽑는 절차이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정의해 본다면 본색을 감추려는 정치인들과 본색을 찾아내려는 유권자들의 숨바꼭질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명한 유권자들은 다른 새의 깃털로 진짜 모습을 감추려 드는 까마귀를 식별해 낸다. 그렇지 못할 경우 무엇이 초래될지는 자명하다. 까마귀들이 설쳐대는 어지러운 세상이 그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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