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진실)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확신이 종교적으로는 훌륭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다. 특히 선거라는 싸움판에서는 진실이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한국 선거에서는 더욱 그렇다. 프레임의 위력이 절대적인데다 지역주의의 망령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4.11 총선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 준 교과서적인 사례였다.
선거는 프레임 싸움이다. 프레임이란 사람들이 세상을 내다보는 창틀이다. 총선에서 진보는 프레임 싸움에서 보수에 완패했다. 진보는 현 정권의 실정과 비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기만 하면 승리할 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보수는 프레임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진보의 말 바꾸기와 김용민 막말 파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야당=믿을 수 없는 세력’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거대 보수언론들이 융단폭격으로 지원했음은 물론이다. 프레임 하나만으로 모든 국민을 설득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민심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기만 해도 박빙의 승부는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의 목소리는 보수의 프레임 공세에 완전히 파묻혔다.
프레임 전쟁은 대개 보수의 승리로 끝난다. 진보는 오랫동안 “보수는 돈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옛 이야기일 뿐이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프레임을 만들고 장악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프레임 안에 진실의 얼굴이 들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먹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대부분의 선거에서 진보는 힘든 싸움을 하게 된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민주당에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프레임 전쟁에서 우위에 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한국에서는 뿌리 깊은 지역주의까지 맹위를 떨치니 승부의 추가 더욱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하거나 선택을 할 때는 항상 ‘옳고 그름’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보다 ‘좋고 싫음’에 좌우되는 경우가 더 많다. 지역주의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가 작동하면 진실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런 맹목적 의식은 선거에서 ‘묻지마 투표’로 나타나곤 한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는 TK 전 지역을 싹쓸이 했다. 경남과 부산도 거의 독식했다. 부산지역의 경우 저축은행 비리와 지역경제 파탄 등으로 선거 전 민심은 흉흉했다. 여당으로서는 고전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단 두석만을 내주며 선방했다.
지역주의는 가족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다. 가족은 평소 으르렁대며 싸우다가도 외부의 위협이 있다 싶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똘똘 뭉친다. 성추행과 논문표절 의혹을 받는 함량미달 인사들조차 이런 온정적 지역주의 덕분에 가뿐히 금배지를 달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호남도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왜 이런 망국병이 생겨나게 됐는지 기원을 따져 본다면 똑같은 책임을 논할 수는 없다.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호남표 덕분이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는 다른 지역에서 15만표 밀렸으나 호남에서 30만표를 앞선 덕에 당선됐다. 다음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시 영남의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일에 적극 나서 망국병인 오늘날의 지역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선제적인 영남의 지역주의와 방어적인 호남의 지역주의에 기계적인 양비론을 들이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영호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을 변수라고 하더라도 보수와 진보의 상수라 할 수 있는 영남과 호남은 정치적 비중에서 현저히 다르다. 마치 중학생과 대학생의 덩치만큼 차이가 난다. 그러니 보수는 100미터 경주에서 항상 10미터쯤 앞서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진보가 간혹 절묘한 구도에 힘입어 승리하는 일은 있지만 왜 대체로 버거운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지 설명이 된다.
지역주의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심각한 부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한국정치의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진보가 다음 선거에서 승리를 원한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다. 보수의 집요한 프레임 공격과 지역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인물을 내세우는 것뿐이다. 남북대치와 동서대립이 만들어낸 정치공간 속에서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 이것이 한국진보의 숙명이다.
<조윤성 논설위원>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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