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승했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할 때가 있죠.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왔을 것 같아요. 그저 멀리 돌아오느라 시간만 훨씬 오래 걸렸겠죠.”
14년 전 US여자오픈에서 20개 홀 연장 대접전 끝 박세리에게 패한 제니 슈시리폰이 최근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박세리는 그 후 명예의 전당 멤버가 된 화려한 커리어를 작성했지만 태국계 슈시리폰은 지금 임상 간호사로 골프 대회에 나가본지 6년이 넘었다고 했다.
여자골프 최고 전통과 권위의 대회에서 연장 20번째 홀까지 혈전을 펼쳤던 두 20세 처녀의 인생은 14년 뒤 이렇게 다르다. 우승자와 준우승자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슈시리폰은 그 후부터 받기 시작한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 전까지는 듀크 대학생인 아마추어로 아무런 부담이 없이 뛰었지만 박세리와의 명승부 후로는 지켜보는 눈이 많아진 것에 대한 부담이 컸다고 털어놓았다. 또 US여자오픈 우승을 아깝게 놓친 선수로서 높아진 기대치만큼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괴로웠고, 못하면 못할수록 큰 뉴스가 되기 시작한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듀크에서 슈시리폰의 코치였던 댄 브룩스는 이에 대해 “제니는 팀메이트들과 몰려다니며 경기를 즐길 때 가장 좋은 성적이 나오는 선수인데 US여자오픈 후로는 재미로 칠 수가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99년 US 챔피언십에서 은메달을 따내 잠시 스타덤에 올랐던 한인 피겨스케이터 남나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남나리의 코치였던 잔 닉스도 그 후 비슷한 설명을 했다.
여하튼 슈시리폰은 US여자오픈에서 그만한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결국 프로무대에 도전했지만 성적에 목을 건 프로의 세계는 그녀의 스타일에 맞지 않았다. 성적이 안 나오면 부모가 경비를 부담해야 했던 부분도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슈시리폰은 이에 대해 “성적이 안 나오면 부모가 애써서 번 돈만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부모가 얼마나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인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골프 커리어를 권유했던 모양새다.
1999년에는 스폰서를 구해 2부 투어에서 뛰며 LPGA 투어 진출을 노렸다. LPGA 투어 대회에도 4차례 출전했다. 하지만 계속 컷오프에 걸려 탈락하는 등 성적이 안 나오자 정신적인압박이라도 덜기 위해 스폰서로부터 받은 돈을 모두 반환했다고 밝혔다.
그 와중 2000년 시카고에서 열린 US여자오픈에서 슈시리폰을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 당시 투어카드(LPGA 투어 출전권)조차 따내지 못한 초라한 신세였다. 인터뷰에는 너무나도 친절하게 응했는데 “2년이 지났는데도 한밤중에 일어나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요.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충분히 이길 수도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출전했다”고 솔직하게 말한 슈시리폰은 “여기가 2년 전 대회 장소(블랙울프 런 골프코스)에서 이렇게 가깝고 비슷한지 몰랐다”며 “2년 전 대회가 더 생각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2년 전 아마추어로서 박세리와 연장전서 붙었던 것이 “반은 행운, 반은 불운”이라고 했다.
슈시리폰은 결국 골프채를 내려놓고 2005년 메릴랜드 대학 간호학과에 들어갔다.
2010년에는 임상간호학 석사과정까지 밟았다. 그녀는 새로운 커리어 대해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펏 1개 차로 US여자오픈 타이틀을 놓친 골퍼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고 말했다.
“스포츠는 99% 실망과 고통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는 말이 실감난다. 대회마다, 리그마다 챔피언은 단 하나로 승자만 빼고는 모두들 가슴 아프게 돌아서고, 또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약도 없는 그 날을 위해 끊임없이 피와 땀을 흘리며 수많은 진통을 겪어야 하지만 그러고도 뜻을 이루게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박세리가 25차례 우승할 때는 25명의 슈시리폰이 있었던 셈이다.
<이규태 스포츠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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