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는 지구에서 400년 동안 살고 있는 외계인과 지구 여성의 사랑을 그리고 있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물과 설정으로 스토리를 풀어 나가는 판타지물이다. 그러나 드라마에 푹 빠져 있는 시청자들에게 이런 비현실적 설정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드라마의 내용을 아무런 갈등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문학작품이나 영화의 내용이 환상적이고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독자와 관객들은 별다른 심리적 저항을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사무엘 콜러리지는 문학적 허구를 진실한 전제로 받아들이려는 독자들의 심리를 ‘불신의 자발적 중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불렀다. 의심하기를 스스로 멈춘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문학과 영화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불신의 자발적 중지가 가능한 것은 ‘동일시’ 때문이다. 문학과 영화 속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몰입이 시작된다. 픽션에 깊이 빠져들면서 주인공의 기쁨과 슬픔, 좌절과 승리는 바로 내 것이 된다.
현실에서도 동일시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을 자기 자신인양 여기는 이들이 그렇다. 닮은 것이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동일시에 빠진 사람들은 대상이 당하는 공격을 마치 자신이 당하는 공격처럼 느낀다. 그럴 때 나타나는 반응은 격렬하고 감정적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과 동일시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자동차가 손상되는 일이 생기면 자신이 망가졌다고 느낀다. 심지어 소파 같은 가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물건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물건이 되어버린 경우다. 병적인 상태가 아닐 수 없다.
동일시는 책과 영화를 즐기는 데는 꼭 필요한 심리작용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렇듯 많은 폐해와 병리현상을 낳는다. 자식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부모들은 집착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고통이 된다.
한국 정치가 지난 수십년 동안 발전은커녕 퇴보를 계속해 온 데도 이런 병리현상이 한몫을 해 왔다. 특정 정치인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국민들이 늘어나면서 대화와 타협의 공간은 날로 축소돼 왔다. 이들은 연예인 오빠부대를 닮아 있다. 이들이 보이는 애정은 무조건적이고 무분별하기까지 하다.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증오를 나타낸다.
‘노무현 오빠부대’를 줄인 말인 ‘노빠’로 불리는 노무현 열렬지지자들이 대표적인 동일시 세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분명한 공과 과가 있다. 공은 당당히 내세우고 과는 쿨하게 인정하는 게 진정 노무현을 사랑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노무현을 비판할라치면 과민하게 반응한다. 이런 과다 몰입은 결과적으로 노무현을 욕보이는 일이 된다.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동일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박정희에게도 공과 과가 있다. 그렇지만 ‘박정희교’의 열렬 신도들에게 박정희는 과오가 전혀 없는 ‘반신반인’의 존재이다. 완벽한 무오의 존재에 대한 비판을 이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종박’ 역시 마찬가지다.
동일시에는 필연적으로 불신의 자발적 중지가 뒤따른다.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이다. 냉정한 국민들 눈에 이들은 광신 집단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칼럼을 통해 이들이 동일시하는 인물을 비판하거나, 증오하는 정치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 언급을 할라치면 즉각 감정적 반응들을 보인다. 맹신으로 가득한 의식 속에는 합리적 비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내가 동일시하는 정치인은 100% 옳고 내가 싫어하는 정치인은 100% 그르다고 믿는 배타적인 풍토에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랄 수 없다. 불신의 자발적 중지가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 줄지 몰라도 정치판에서의 이런 퇴행은 결과적으로 더 고단한 현실을 만들어 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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