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엽기내용 논란 일으키자 출판사 ‘유통 시집 회수하고 보유분 폐기’
▶ ’시는 시일 뿐’ 부모, 법원에 회수 및 폐기 금지 가처분신청 제기
초등생이 펴낸 ‘잔혹 동시집’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다. 충격적인 내용의 시를 출간한 자체가 잘못이라는 주장과 함께 어린이가 문제의 시를 쓴 의도가 뭔지 다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논란이 일자 출판사는 시집을 전량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초등생 부모는 동시집 폐기에 반대한다면서 법적 대응에 나섰다.
출판사 가문비는 지난 3월30일 초등학생 A양(10)의 동시집 ‘솔로 강아지’를 출간했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서 논란이 된 작품은 ‘학원가기 싫은 날’.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 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 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학원가기 싫은 날’ 전문)
학원에 가기 싫다는 이유로 엄마를 살해한다는 엽기적인 내용과 함께 한 여학생이 피가 낭자한 상태로 누워 있는 엄마 옆에서 입 주변에 피를 묻힌 채 심장을 물어뜯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삽화가 문제가 됐다.
논란이 일자 출판사 측은 시집을 전량 폐기하겠다고 했다. 출판사 발행인은 지난 5일 출판사 블로그에 글을 올려 “‘솔로 강아지’의 일부 내용이 표현 자유의 허용 수위를 넘어섰고 어린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의 항의와 질타를 많은 분으로부터 받았다. 모든 항의와 질타를 겸허히 수용하고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솔로 강아지’ 도서 전량을 회수하고 갖고 있던 도서도 전량 폐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자 A양 아버지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솔로 강아지’ 회수 및 폐기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유명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로 알려진 A양 아버지는 시집에 실은 시 58편 가운데 한 편의 문제만으로 책을 모두 회수하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의 내용과 삽화가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면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볼 수 없도록 주의 문구를 넣거나 비닐 포장을 씌우는 방법이 있다”면서 “딸이 쓴 내용이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부분인데 이것이 논란이 됐다고 해서 폐기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는 아이의 시를 시로 본 것이고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면서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학원 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보내는 게 맞는지, 아이들의 이야기가 뭔지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A양 어머니도 시집 전량 폐기에 반대했다. 등단 시인이기도 한 A양 어머니 김모씨는 7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량 폐기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엄마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어리지만 작가로서 딸의 자긍심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문제의 동시 ‘학원 가기 싫은 날’에 대해 “나름 작품성과 시적 예술성을 갖췄다고 확신한다. 영어로 번역한 이유도 ‘엽기호러’를 콘셉트로 한 아동문화사에 의미 있는 동시가 한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유럽과 미국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딸이) 엽기ㆍ호러ㆍ공포 소설과 ‘전설의 고향’ ‘여고괴담’ 같은 무서운 영화를 좋아해 그것을 자신의 시적 전략으로 삼았다”면서 “한국 아동문학사에서 새롭고 현대적인 동시로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딸이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미술ㆍ복싱 학원을 다니고 있다면서 “학원지옥과 입시지옥에 대한 우화로서의 이 귀한 시가 아동문학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희망했기에 이 시를 출판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넣자고 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어차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아 딸에게 악플을 보여주기도 했다면서 “(딸)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곧 ‘엄마 그래도 난 내 시가 좋아!’라고 말하더라”라고 밝혔다. 김씨는 현재 딸이 과도한 취재 열기로 인해 현재 등교하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학원가기 싫은 날’이란 작품에 거부감을 표하는 네티즌들은 출판사와 A양 부모를 동시에 비판한다. 이들은 “이 책을 내고 출판사랑 부모는 웃었겠지? 이게 더 잔혹한 현실이다” “열 살 애가 저런 시를 쓰는데도 부모는 좋다고 출판하다니…. 잔인하기만 하지 예술로는 안 보인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전량 폐기 처분은 당연하다. 표현의 자유도 정도가 있다”라면서 시집의 전량 폐기에도 찬성하고 있다. 문제의 시를 옹호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는 건 일베를 옹호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나왔다.
일부 전문가는 어린이가 시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자체는 존중하지만 시를 쓰는 행위와 시집으로 펴내는 행위는 별개로 다뤄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는 5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어린이가 자신의 목소리를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삐삐 이후 일관된 현대 아동문학의 방향이었다”며 “그 어린이들의 용기 있는 말을 지키고 존재의 성장을 응원하고 대신 공격받기 위해서 어른인 동화작가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어린이가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는 일과 출간은 별개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오직 자녀의 재능이 대견해서 투고하는 부모도 많다”고 했다.
조인희 소아청소년정신과의사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조씨는 7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끔찍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말 아이의 마음속에 이런 괴로움이 있다면 반드시 표현돼야 하고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시집이란 형태의 문화적 창작물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선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만일 이 닦으란 잔소리가 싫어서, 숙제하란 엄마가 미워서, 미운 동생의 심장을 뜯어 먹고 싶다면? 그래도 아동의 표현의 자유를 출판하는 것을 지지했을까?”라고 말했다. 조씨는 “교육계의 무능과 부모의 탐욕으로 엉망이 된 교육제도의 부끄러워한 민낯을 자책하는 어른들의 시선이 아이의 마음속 고통이란 소재에 투사돼 시대의 자화상처럼 삽화까지 달린 채 출판되는 당위성을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A양의 동시를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미학자인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6일 트위터에 글을 올려 “딱 그 시 한 편(‘학원가기 싫은 날’) 끄집어내어 과도하게 난리를 치는 듯. 읽어 보니 꼬마의 시세계가 매우 독특하다. 우리가 아는 그런 빤한 동시가 아니다. ‘어린이는 천사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는 ‘어른이’들의 심성에는 그 시가 심하게 거슬릴 거다. 그런 분들을 위해 시집에서 그 시만 뺀다면, 수록된 나머지 시들은 내용이나 형식의 측면에서 매우 독특해 널리 권할 만하다. 이런 문제는 서슬 퍼렇게 도덕의 인민재판을 여는 대신 그냥 문학적 비평의 주제로 삼았으면 좋겠다. 근데 아이가 너무 조숙한 듯. 그림 형제의 언캐니한 동화+카프카스러운 세계감정이랄까”라고 말했다.
일부 네티즌도 진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 “아이가 어른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시 같다. 너무 자극적이긴 했지만 감정에 너무 충실하다 못해 분노를 표현한 게 어른 눈에 자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 “잔혹 동시 쓴 초등학생은 그냥 똑똑하고 어휘력 좋은 아동으로 보임. 다만 정제된 표현을 사용할 때의 이점을 가르쳐주려는 지도가 부재해 보일 뿐” 등의 의견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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