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있던 내용 지우고 그 위에 찬송가로 덧씌워
▶ 특수촬영·컴퓨터 이용 바탕글 복원·분석 들어가
■ 고대 시리아어로 옮긴 ‘간단한 약제의 혼합과 효능’
지난 2013년 2월, 볼티모어에 거주하는 한 부호의 서재에서 양피가죽에 고대 시리아어로 쓰인 의학서 필사본을 직접 보았을 때 그레고리 케셀 박사는 심한 기시감에 빠졌다. 독일 마르부르크 소재 필립스 대학의 고대 시리아어 학자인 케셀 박사는 희귀문서 수집광인 집 주인이 공개한 1,000여년 전의 필사본을 살펴보던 중 양피지에 쓰인 글씨체가 아무래도 눈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양피지 문서는 서기 2세기에 사망한 페르가몬의 의사이자 철학자 갈렌이 그리스어로 쓴 의학서적 ‘간단한 약제의 혼합과 효능’을 고대 시리아어로 옮긴 것이었다. 갈렌의 글은 덧쓰기로 상당부분이 지워져 있었다. 서기 11세기의 이름 모를 서기가 의학서의 고대 시리아어 번역본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찬송가를 덧씌워 적어 놓았다. 당시 유행하던 양피지 재활용 방식이다. 이처럼 글을 이중으로 겹쳐 쓴 책을 복기지(palimpsest)라 부른다. 당대의 식자계층이었던 서기들이 복기지에 써놓은 고대 시리아어는 예수님이 사용했던 아람어의 사촌 격으로 중동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됐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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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를 넘겨가며 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던 케셀 박사는 자신의 기시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곧 깨달았다. 복기지에는 7쪽이 찢겨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뜯겨 나간 부분을 보는 순간 케셀 박사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3주 전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본 양피지 한 쪽이 바로 문제의 책에서 떨어져 나간 7쪽 가운데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감’은 적중했다.
신바람이 난 케셀 박사는 나머지 여섯 쪽을 모두 찾기로 결심하고 고대 시리아어로 쓰인 책을 소장한 전 세계의 박물관들을 대상으로 ‘수색’에 착수했다.
11세기에 ‘찬송가 모음’으로 리사이클링된 갈렌 의학서의 번역판 필사본이 1920년 독일에서 개인 소장가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의 과정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1920년 이후 대중의 눈에서 사라졌던 이 책은 2002년 은밀한 개인거래를 통해 고서적 수집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책을 입수한 볼티모어 부호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2009년 갈렌 복기지는 월터스 아트 뮤지엄에 대여됐고 그곳에서 밑바탕 글 복원을 위한 ‘스펙트럴 이미징’ 절차를 거쳤다.
전문가들은 특수조명으로 윤곽과 흔적이 뚜렷이 드러난 복기지의 원래 바탕글을 디지털 카메라로 한쪽 한쪽 촬영했다. 이어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해 바탕글의 가시성을 극대화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종 결과는 비영리 목적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CCL 기호와 함께 온라인에 올려졌다.
온라인에 이미지가 뜨자 박물관의 고문서와 희귀도서 큐레이터인 윌리엄 노엘은 고대 시리아어 과학관련 문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모아 새로운 자료 분석에 착수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케셀 박사였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덤바턴 오크스 리서치 라이브러리’의 펠로십으로 와 있었다. 덤바턴 오크스는 하버드대학 소속의 연구소 겸 박물관이다.
갈렌 복기지에서 찢겨나간 7쪽을 찾으려는 케셀 박사의 노력은 빠른 속도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페이지 크기와 필체, 복원된 텍스트 등을 근거로 케셀 박사는 하버드대학 도서관에서 그가 본 낱장이 복기지에서 떨어져 나온 것임을 확인했다. 나머지 6쪽을 찾기 위해 그는 고대 시리아어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 세계 도서관 10곳의 명단을 작성한 후 찢겨진 고문서 낱장들이 있는지를 일일이 확인했다.
그 결과 이집트에 있는 시나이 반도의 세인트 캐더린 수도원에 한 장이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세인트 캐더린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 시간 쉬지 않고 운영되어 온 도서관을 갖고 있다.
또 다른 낙장은 파리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냈다. 바티칸의 방대한 도서관에서는 무려 3장이 나왔다. 나머지 7번째 낙장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공백이라 서기관에 의해 버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졌던 6쪽이 모두 발견되자 학자들은 본격적인 연구에 나섰다.
갈렌의 ‘간단한 약물의 혼합과 효능’은 그리스에서 싹을 틔운 의학이 어떻게 고대 세계 전체로 전파됐는지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수세기에 걸쳐 갈렌의 대표작인 ‘간단한 약물의 혼합과 효능’은 의사 지망생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이 책은 환자 돌보기, 약초 등 약에 관한 고대의 의학 지식을 한데 묶어 정리해 두었다.
이 책에서 갈렌은 칼칼한 목에 잘 듣는 나무뿌리를 소개했으며 아픈 귀를 치료하는 즉효약으로 대마초를 추천했다. 그는 대마초가 개스가 자주 차는 복부팽만증을 초래하지 않지만 정액을 말려버린다고 경고했다.
볼티모어의 희귀도서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갈렌의 ‘간단한 약초’는 9세기에 고대 시리아어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된다.
볼티모어 복기본은 서기 6세기께 레샤이나에서 의사이자 목사로 활동했던 세르기우스가 사상 최초로 고대 시리아어로 번역한 내용을 그로부터 3세기 뒤 서기들이 양피지에 베껴 쓴 것으로 보인다.
케셀 박사는 “요즘에야 번역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작업이었다”며 “세르기우스는 그리스의 의학용어를 고대 시리아어로 바꾸기 위해 아마도 의학용어 사전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기 6세기에 이르면 고대 시리아어를 구사하는 기독교인들이 터키로부터 시리아를 거쳐 이라크와 이란으로 들어가게 된다.
선교에 나선 앗수르 기독교인들은 이라크와 이란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책으로 병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돌팔이인 이들은 문명개화국이었던 그리스의 의학과 과학서적을 필요로 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의학서가 총 11권의 논문으로 구성된 갈렌의 ‘간단한 약물’이었다.
세르기우스에 의해 고대 시리아어로 번역된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숫한 필사본을 만들어냈고 결국 고대 그리스의 의료기술을 이슬람 사회로 전달하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했다. 고대 시리아어로 번역된 필사본이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보다 아랍어로 번역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중근동 지역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과 반비례해 이곳의 기독교 인구는 줄어들었고 고대 시리아어는 망각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케셀을 비롯한 고대 시리아어 학자들은 스펙트럴 이미징을 거쳐 복원한 갈렌의 “간단한 약물” 번역에 매달리고 있지만 끝을 맺을 때까지는 최소한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언어로 번역된 갈렌 의학서 전권이 있긴 하지만 텍스트 자체가 고대 시리아어로 쓰인 것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필사과정에서 상당한 오류가 끼어들고 서기관들의 가필과 생략 등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정확치가 않다.
케셀 박사는 번역작업이 완료되면 다른 번역판과 내용을 비교하는 작업을 벌일 것이라며 “아마도 복기지가 고대 의학 연구의 중심 텍스트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뉴욕타임스 특약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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