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음악적 소질 많아 음악가 꿈꿔
음반협회 회장 맡아 활동폭 넓히기도
중국 거쳐 뉴욕으로...부동산회사 창립
경영철학은 광고와 철저한 실무교육
그는 직원들의 한결같은 복장을 꼼꼼히 챙긴다. ‘감색 정장. 하늘색 또는 흰색 와이셔츠. 빨간 넥타이. 이름표’. 언제나 이런 옷차림으로 손님을 맞이하도록 한다. 소속감과 회사의 이미지도 높이기 위함이다. 물론, 고객에게 신뢰감을 주고, 첫 만남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는 전략도 숨어 있다.
그는 직원의 자부심도 중요시 여긴다. 직원들이 다함께 'I can do. You can do. We can do'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유다. 거기엔 직원 모두가 항상 자신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면서 성공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전 직원들이 다 함께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주인공은 뉴욕뉴스타부동산 스티브 박(58) CEO다.
■‘피아노, 기타, 테너 색소폰’
그는 1957년 12월 인천에서 태어났다. 3남3녀의 세 째다. 여동생이 셋이다. 어린 시절 꿈은 음악가. 초등학교 땐 피아노를 배웠다. 바이엘 다음 체르니 100까지 쳤다. 그렇게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음악가를 원하지 않으셨다. 피아노를 연주할 정도가 딱 이었다. 음악가의 꿈을 접은 이유다. 하지만 탁월한 음악성은 버리진 못했다. 중학생 땐 기타를 배웠다. 중학교 시절 취미생활은 유행가요 기타 연주였다. 동산고교에선 밴드부에 들어갔다. 악기는 테너 색소폰. 콘닥터도 맡았다. 당시 봉황대기 3연승의 야구부 경기응원은 밴드부의 몫이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자라면서 기타, 색소폰 등 악기 다루는 것이 좋았다. 어린 시절에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음악 하는 사람을 ’딴따라‘ 취급하는 시대라 부모들은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꿈을 접어야 했다”고 말한다.
■정계진출 꿈마저 접고
그는 동국대학 79학번. 전공은 전자공학. 음악하고는 다른 길이다. 취업하기 쉬운 공부를 택했다. 2학년을 마치곤 군대에 갔다. 훈련소에서 하사관으로 차출 20주 훈련을 받았다.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다. 사회생활이 어렵고 힘들 때는 도움이 많이 됐다. 제대 후 복학해 3, 4학년 공부를 마무리 했다.
첫 직장은 비디오와 오디오 테이프 관련 회사의 대리점 담당부서. 1년 동안 일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전국 오디오, 비디오 도매상’을 설립한 것이다. 사업은 80년대 중반 비디오테이프 붐으로 탄탄대로였다. 그 시절 전국 비디오, 오디오 총괄협회인 사단법인 음반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29세 때 인천직할시 지회장, 이어 중앙회 수석부회장을 맡았다. 32세 때는 전국 8,000여 명의 대의원 선거에서 중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정부위임 ‘불법음반 단속권한’으로 그는 2년 임기동안 한국에서 불법음반 퇴치 공헌과 음반업계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한 그는 제물포 청년회의소와 사단법인 음반협회 등을 통해 리더십을 키웠다. 정치인, 중앙공무원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유대관계를 맺었다. 더불어 뛰어난 단체 조직력과 강력한 리더십 등을 토대로 정치가를 꿈꿨다. 고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당시 선거캠프 합류로 정계진출의 발판을 삼았다.
참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가 갈 길은 아니었다. 자신이 관리하던 운동원이 대선 3일전 상대후보 선거캠프에 합류, 배신행위를 했다. 그 책임을 지고 홍콩으로 잠시 피해야 했다. 하지만 1년이 넘게 됐고, 그 과정에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계에 회의를 느껴 아예 정치인의 꿈을 포기하게 된다.
■최고의 한인부동산 회사로
그는 1994년 중국 심천에서 23개 계열사를 소유한 쉰중(중국인)이라는 그룹회장과 ‘중한 부동산 투자 개발공사’를 공동으로 설립한다. 그의 역할은 대기업을 비롯한 한국기업을 대상으로 중국 부동산 투자를 안내하는 것. 2년 동안 중국전역을 돌아다니며 상류층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맺었다. 열심히 공부해 중국인과 대화할 수 있는 중국어 실력도 쌓았다. 그러나 부동산개발 및 투자유치 사업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녀교육이 우선인 그는 지난 1996년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왔다. 영주권 취득을 위해 뉴욕에 머물면서 이민생활이 시작된 것. 당시 한인부동산 업계는 걸음마 단계. 이 분야의 선두주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우선 부동산 에이전트 자격증을 취득했다. 1년 후에 동업으로 부동산회사를 차렸다. 직접 현장도 뛰었다. 그의 장점은 중국어 구사. 중국인 주택을 한인들에게 좋은 가격과 조건으로 매매 및 임대해 줄 수 있었다. 중국시장 개척의 선두주자였다. 늘 탑 에이전트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1999년 뉴스타부동산을 독자 설립했다. 최고의 한인부동사회사로 성장한 뒤 미 부동산업계와 경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7년 서부의 남문기 대표와 인연을 갖고 뉴스타 부동산으로 운영을 해왔다. 2015년부터는 뉴욕뉴스타부동산으로 법인을 바꿔 50명 정도의 직원을 두고 있는 부동산회사의 CEO로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신규 에이전트를 6개월 만에 25만 달러를 벌 수 있도록 교육시켜 탑 에이전트로 성장시킨 일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성공한 에이전트가 스플릿을 90% 준다는 유혹에 빠져 다른 부동산회사로 갔다가 아예 부동산업계를 떠난 것을 안타까워한다.
실무교육, 효율적인 광고 및 클로징 까지 도와줘 탑 에이전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배신하는 에이전트 대부분은 다른 회사에 가서는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동산 거래는 정보를 서로 공조하고 협조해야 거래를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그는 부동산 매매시 경험 많고 믿을 수 있는 회사 선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회사에는 각 분야의 전문브로커가 많기 때문이다.
셀러나 바이어는 브로커를 잘 만나는 것이 50%는 성공한 것과 다름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전문분야 브로커는 항상 좋은 정보와 손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경영철학은 과감한 광고와 철저한 실무교육이다. 부동산 업계는 그 무엇보다도 광고가 가장 중요하다. 과감하게 광고를 쏟아 부었더니 성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시간이 상당히 단축된다는 것을 체험했다고. 철저한 실무교육은 신규 및 기존 에이전트들에게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한다. 광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리스팅은 어떻게 받는 것이 효과적인지, 셀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에이전트들과 지식과 정보를 공유한다. 그런 교육으로 더욱 더 많은 거래를 성사시켜 에이전트와 회사가 상생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란 것이다.
그는 “에이전트 교육을 시키지 않고 스플릿 90%를 유혹의 미끼로 내세워 기존 에이전트들을 동요케 하는 방식으로 영업하는 부동산 회사 및 에이전트가 성공한 사례를 20여 년 동안 부동산 업계에 몸담아 오면서 본 적이 없다. 한인 부동산 업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앞으로 그런 광고로 에이전트를 현혹하는 부동산회사는 이제 자중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한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
그는 1983년 가을 결혼했다. 중매로 인연을 맺었다. 그에게 아내는 항상 가정에 충실한 현모양처로서 힘이 된다. 치매가 있는 시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더 그렇다. 회사 일에도 항상 도와주는 든든한 동역자다. 그가 “결혼이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다. 그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뉴욕 주 경찰인 큰 아들 박 진홍(33). 큰 며느리 은주. 둘째 아들 박 진섭(32)은 연방공무원. 작은 며느리는 정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 온하(4)와 유하(1)가 있다.
종교는 기독교. 현재 1,500여 명 이상의 신도가 다니고 있는 베이사이드교회(담임 목사 이종식)에서 집사로 섬기고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매사에 적극 도전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그는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에 근면과 성실 그리고 노력을 가훈으로 삼고 항상 그렇게 살고 있다. 취미는 골프. 핸디는 13 정도.
“나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그는 부동산 면허를 갖고 고객의 재산을 충실히 지켜주고 증식시켜주는데 정직하고 성실하게 거래를 하여 셀러나 바이어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부동산 브로커라고 정의한다. 부동산 브로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정직’이라는 것이 소신인 것이다. 항상 고객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하고 직원들을 격려하는 것도 아끼지 않는 그에게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엿보인다.
그는 남은여생은 부동산 브로커를 천직으로 여기며 한인 부동산업계를 발전시켜 나가는데 이바지하며 불쌍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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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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