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뉴욕에서 육영수 여사 동상건립을 위한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 참석차 5월말 뉴욕을 방문한 육영수 추모동산 건립위원회 대표위원장 이경재씨가 내게 미주 자문위원 임명장을 서울로 부터 갖고 와 전달 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새삼 육영수 여사를 회상하게 되는 것은 여사를 기억이 새롭기 때문이다. 내가 육 여사를 만난 것은 지난 1966년 봄 오전이었다. 당시 나는 동양통신사에 최초로 시험을 통해 채용된 여기자로 있을 때였다. 고려대학교 심리학 대학원에 재학중 우연히 한 번 시험 친 것이 내 인생 최초의 경력이 된 것이다.
하루는 편집국장(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 창설)이 나에게 “육영수 여사와 단독 인터뷰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어안이 벙벙해 나는 그저 “예” 하고 대답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육 여사는 신문기자들에게 ‘단독 인터뷰’를 준 것이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육 여사는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양지회’라는 본인이 세운 각료, 비서관부인들의 자선모임에 갔는데 육 여사는 먼발치에 있는 내게까지 눈웃음으로 인사를 던졌었다. 사진 기자를 대동하고 청와대 문안에 들어서니, 박정희 대통령이 2-3명의 비서진과 청와대 건물 앞에 서서 누구를 기다리는 듯, 한가한 자세로 비서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보더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의 눈길이나 거동은 군인 혁명가로 내가 인식했던 딱딱한 남성이 아니라 온유하고 자상한 이웃과도 같은 인상이었다. 내부로 들어가자 홍 여비서관은 허물없이 우리를 작은 티 룸으로 인도하였다. 육 여사는 오랜만에 재회하는 조카를 보듯 환한 웃음과 유연한 자세로 나를 맞았다.
그분은 흰 공단 치마저고리를 입고 몸에 걸친 보석은 하나도 없었다. 기억에 남는 일은 그분의 손가락이 길고 예술적으로 곱게 생겼으나 악수를 했을 때 그 손바닥이나 손의 감각은 전체적으로 딱딱하고 거칠었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거침없이 해내고 남자보다 더 손이 험했던내 모친을 연상시켰다.
인터뷰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그분의 솔직한 유머,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배려, 진취적인 태도 등은 나를 거의 황홀 지경으로 몰아갔다. 인터뷰가 끝나자 육 여사는 홍 비서에게 “이분, 너무 좋다. 전화번호와 연락처 받아두어요.” 했다. 그때 나는 잠시, “아, 육영수 여사가 나를 청와대로 스카우트하려나 보다” 하고 가슴이 부풀었지만, 홍 비서의 전화는 끝내 오지 않았다.
육 여사와의 인터뷰 기사와 사진은 모든 전국지에 다 게재 되었고 육 여사의 미모와 우아한 자태는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세월이 흘러 그의 딸 박근혜 씨가 10여 년 전쯤 뉴욕 퀸즈에서 강연했을 때, 본인은 육 여사와 인터뷰한 역사적 인연으로 박근혜 씨를 청중에게 소개하는 일을 맡았었다. 눈물겹게 인상에 남았던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분위기와 방불했던 따님의 모습, 그 당시 대선에 입후보한 상태도 아니었으나 많은 사람 앞에서 의연하게 정신적 저력을 보이는 따님의 자태는 어머니와 또 다른 고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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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윤 교육가/ 엔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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